통화를 녹음하면 알림을 보낸다고?

조회수 2017. 8. 23. 14: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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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당신의 통화를 녹음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통화를 녹음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 이런 메시지가 온다면 어떨까요?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김석기·강석호·이완영·추경호·박명재·최교일·조경태·이정현·원유철 의원이 공동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법률개정안’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우리나라는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상 대화 당사자라면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습니다. 통화 녹취 파일은 재판 증거로도 흔하게 채택되고 있죠.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타인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당사자 중 한쪽의 동의를 얻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최근 김광림 의원 등이 발의한 법률개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팩트체크부터 하자.


개정안에서 김광림 의원 등은 ‘미국에서는 워싱턴DC와 뉴욕, 뉴저지 등 37개 주에서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미 IT매체 <라이프해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전화 통화 내용을 통화 당사자가 녹음하는 것은 합법입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통화 내용을 녹음할 수 있다는 거죠.

  • http://lifehacker.com/5491190/is-it-legal-to-record-phone-calls
  • http://www.dmlp.org/legal-guide/recording-phone-calls-and-conversations
  • http://www.dmlp.org/legal-guide/illinois-recording-law
  • https://www.law.cornell.edu/uscode/text/18/2511

미국은 주마다 법이 조금씩 다른데요, 당사자 모두 통화 녹음에 동의해야만 하는 주들도 있긴 합니다.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플로리다,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미시간, 몬타나, 네바다, 뉴햄프셔, 펜실베니아, 워싱턴 주가 여기 해당됩니다.


일리노이 주도 여기 포함됐다가 2014년에 일방 당사자 동의만 있으면 통화 녹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델라웨어 주는 법이 약간 충돌한다고 <라이프해커>가 주석을 달아놨고, 버몬트 주는 특별히 해당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편이 좋다고 하네요.


코넬 로스쿨 사이트에서도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광림 의원실은 “<매일경제신문>에서 냈던 기사를 재인용한 것뿐이다”라며 “구체적인 의안 발의 이유는 의안원문에 전부 나와있어 설명할 것이 없다”라고 답변했습니다.


8월14일 사단법인 오픈넷은 성명을 내고 “해당 개정안은 입법 취지의 측면, 현실적 부작용의 측면,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한 함의의 측면에서 모두 심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라며 비판했습니다. <슬로우뉴스>는 8월17일 ‘쉽게 씌어진 법: ‘통화 녹음 알림법’이 엉터리인 이유’ 기사에서 법안 발의는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팩트체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는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허광준 오픈넷 정책실장은 “외국 사례의 사실관계가 다 틀리다. 구체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반대로 파악해야 맞다”면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통화 녹음시 일방 당사자의 합의만 필요한 나라가 더 많고 두 사람 모두 동의를 해야만 해야 하는 경우가 몇 군데 없더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래는 오픈넷이 미국 현지 로스쿨 교수와 외국의 영문 자료를 토대로 조사해 정리한 내용입니다.

허광준 오픈넷 정책실장은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내부고발자나 언론에게 통화 녹음 기능은 아주 중요하다”라며 “이를 금지하고 싶다면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야지, 녹음 통지 강제라는 편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통화녹음 알림법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측은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보호수단’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권력 기관의 부패나 사회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에 통화녹음이 중요한 장치로 활용돼 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뭐, 이참에 생각은 해보자.


자유한국당은 오보에 기반해 사실관계 확인도 하지 않고 법안을 내놨고, 그런 만큼 내용 역시 헐겁습니다. 문제투성이죠. 


그렇다고 해서 통화녹음을 알리자는 말 자체가 꼭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만이 주장할’ 어불성설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재 통화녹음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나라도 있고 허용하고 있는 나라도 있으니 말이죠. 


우리나라는 제3자만 아니면 된다는데, 통화하는 당사자라도 상대에게 알리지 않고 통화를 녹음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보는 쪽의 법적 논리는 뭘까요? 

사실 말하는 내용이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 누구나 주의를 기울여 말하게 됩니다. 통화하는 당사자가 내용을 녹음하더라도 한쪽이 모르고 있으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죠. 이것이 음성권 침해, 그리고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률상으로 직접적인 규제조항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조건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흔히 사생활, ‘프라이버시’라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아니, 숨길 게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사생활을 지키려고 하면 꼭 ‘잘못하지 않으면 거리낄 게 없다’는 논리가 등장하지만 글쎄요. 컴퓨터할 때 방문만 열려 있어도 신경쓰이는데 내가 누군가한테 한 말이 평생 남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오싹합니다. 


컴퓨터 보안 전문가 브루스 슈나이어는 ‘숨길 게 없으면 된다’는 논리 밑바탕엔 “사생활이란 잘못을 숨기는 것이라는 틀린 전제가 깔려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염규호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언론법 교수의 ‘미국에서의 프라이버시 침해와 언론의 자유-판례를 중심으로’ 논문을 보면 1989년 미 연방대법원은 ‘프라이버시’를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정보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사생활에 대해 갖고 있는 권리인 셈이죠.

이 정의를 곱씹으면서 다음 판례를 봅시다. 수원지방법원 2013. 8. 22. 선고 2013나8981 손해배상(기)인데요, 한쪽이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통화내용을 녹음하고 이를 녹취서 등으로 작성해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내용이 알려지게 한 경우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 형사처벌되지는 않으나 민사적으로는 불법행위에 해당해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일방적인 녹취가 음성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미국과 유럽 등 대륙법과 영미법 국가를 불문하고 통화 상대방의 동의 없는 비밀녹음은 적어도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다수 국가의 입법례이자 판례의 태도"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음성이 자기 의사에 반하여 함부로 녹음되거나 재생, 녹취, 방송 또는 복제·배포되지 아니할 권리(음성권)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헌법상 인격권에 속하는 권리”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다만 대화가 사생활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사생활 침해라고 보기 힘들 수 있습니다. 언론이 공익을 위해 공인의 발언을 녹취하고 보도한 경우가 그렇죠. 예를 들자면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이 SBS 기자와의 통화에서 급식 조리 종사원들을 두고 “동네 아줌마”라고 말한 것 등이 여기 해당할 수 있겠네요. 물론 법적으로 첨예한 부분들은 재판정에서 다룰 문제겠습니다만.


허광준 오픈넷 정책실장은 “중요한 것은 통신법이 도·감청을 방지하는 것이 원래의 입법 취지였다는 데에 있다”면서 “녹음물의 활용을 규제하는 나라는 많으나 사후 판단이 있다고 해서 녹음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일방적인 통화녹음을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또 언론이 공익적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통화녹음, 사생활도 중요하고 사회적 약자의 피해 구제수단으로서의 기능 역시 중요하죠. 우리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걸까요?


법학자 대니얼 J.슬로브는 자신의 저서 ‘숨길 수 있는 권리’에서 “건전한 정책을 만들 때에는 타당성을 확인받는 건전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통화내용에 대해 사생활 보호를 고민한다면 통화녹음 자체를 의무적으로 알리는 방법도 있겠죠. 통화 녹음 버튼을 눌렀을 때 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이 통화 내용은 녹음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몇몇 국가들처럼, 통화녹음물의 활용을 세심하게 규제함으로써 사생활 침해 문제를 보완하는 방법도 논의해볼 수 있을 거고요.


우리가 꼭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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