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계 성폭력 고발, 그 후

조회수 2021. 3. 20.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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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브장&디담 작가 인터뷰

“나는 첫 사건이 아니라 첫 공론화였을 뿐이었다.” 

지난해 말 출간된 만화 '나, 여기 있어요'는 2014년 처음으로 만화계 성폭력을 공론화하고 승소한 브장 작가가 동료 디담 작가와 함께 만든 책이다. 주인공 ‘현지’가 유명 만화가이자 한국만화가협회 이사인 권력자 ‘정한섭’의 문하생이 되어 성추행과 폭력, 임금 체불을 당하고 피해를 공론화하는 과정을 그렸고, 사건 전개 과정과 더불어 피해 시 대처 방법까지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두 작가는 같은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만들었고, 업계 내 성차별 문제를 가시화하고 개선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스스로를 위해 분투하고 타인을 위해 연대하는 두 사람의 손은 더없이 귀하고, 그 손으로 ‘여기에서’ 살아남고 ‘여기에서’ 그려갈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왼쪽부터) 디담작가와 브장작가.

Q.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란 걸 아는 터라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더 아팠어요. 책이 나온 뒤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A.

브장 SNS로 미술, 사진 등 예술계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분을 포함해 많은 분이 저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얘기해주셨어요. 그리고 고소까지 하셨던 한 피해자가 여태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이 책을 보면서 위로를 얻었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Q.

내용이 현지가 피해자 상담을 하는 현재에서 과거 피해 당시를 회상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잖아요. 마지막 부분에 가면 책 제목이 ‘나, 여기 있어요’인 이유가 드러나는데, 피해자가 공론화 이후 당연히 업계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으셨나요?

A.

브장 상담을 하면서 피해자들을 많이 만나는데, 책에 나온 것과 비슷한 내용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당사자인 줄 모르고 “그때 그 사건 아세요?” 하고 물어보시는데,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본인도 업계에서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일 거예요. 가해자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데도, 피해자가 업계를 떠난다는 건 어마어마한 공포가 되는 거예요. 이런 말을 계속 들으면서 피해자가 여전히 업계에 살아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책 <나 여기 있어요> 표지. 교양인 펴냄.

Q.

책을 필명으로 쓰시고, 책 내용도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사진 촬영은 안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타 매체와 인터뷰하면서도 선뜻 사진 촬영에 응하셨더라고요. 

A.

브장 사실 이쪽 업계 사람들은 브장이 저인 걸 알아서 놀라진 않았어요. 오히려 외부 분들이나 인터뷰하는 관계자들이 얼굴을 공개해도 되느냐며 걱정하시더라고요.(웃음) 저와 대화하면서 실수할까 봐 염려하시기도 하고요.

Q.

저도 준비하면서 혹시 실수하진 않을까 해서 걱정했어요. 예전 인터뷰에서 “2차 가해가 될 거라는 생각들이 피해자를 숨게 하는 것들도 있는 것 같다.”라고도 말씀하셨더라고요. 

A.

브장 저는 ‘2차 가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렇게 정의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 말을 한 사람을 가해자로 낙인찍기에 바빠요. 2차 가해성 발언에 상처받는 건 피해자인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세상의 주목이 쏠려 피해자는 가려지거든요. 그러면 지목받은 사람은 본인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다시 2차 가해를 하고요. 그래서 전 ‘2차 피해’라고 표현해요. 제 사건은 워낙 예전 일이기도 하고, 웬만한 질문에는 피해자가 숨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 사람이 정말 몰라서, 무지해서 나오는 질문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걸 논의하는 장이 필요하죠. 


디담 그러니까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될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단 문제가 되는 이유를 논하는 이야기의 장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앞으로 같은 사건이 생겼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잖아요. 지금은 이런 장 자체가 마련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항상 사건이 터질 때만 얘기가 나오고 ‘2차 피해야.’, ‘2차 가해야.’ 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모두 입을 닫아버리잖아요. 이런 사건이 있기 전에 담론의 장이 마련되고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식이 생겨야 문제가 다시 생겼을 때 모두가 그 인식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Q.

작업할 때 두 분이 어떻게 분담했어요? 

A.

디담 일단 메인 스토리는 브장 작가님이 끌고 가시고, 계속해서 둘이 피드백과 아이디어를 나눴어요. 특히 작품 들어가기 전에 기획 의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어떤 부분을 담으면 좋을지 계속 이야기했고 작화는 나눠서 그렸죠.

브장 제일 중요한 건 피해자가 읽어도 트리거(방아쇠)가 당겨지지 않게 하는 거였어요. 폭력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최대한 폭력성을 배제하고 그리려고 했고요.

Q.

그런 노력 중 하나는 가해자인 정한섭이나 현지 오빠의 눈을 안경으로만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 같아요. 폭력을 재현하는 수위를 어떻게 정하셨는지 궁금해요. 

A.

브장 직접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그림자만 비치게 하거나 정황상 알 수 있는 정도로만 표현했고, 가해자에겐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또, 피해자에게선 전형적인 피해자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을 최대한 빼려고 했어요. 사실 제가 (피해) 당시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힘들어했어요. 맨날 울고 공포에 떨고 그랬는데, 이런 장면들을 넣는 순간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 부각되니까 빼는 게 낫겠더라고요. 또 책에 나오는 피해 사실은 순화한 게 많아요. 2차 피해 부분을 포함해 전부 순화하면서 주인공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을 당했는지보다는 어떤 구조에서 이런 폭력이 발생하는지에 초점을 맞췄어요.

Q.

일상으로 복귀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싸운 이유가 뭔가요?

A.

브장 저 혼자 조용히 잘 먹고 잘 살면 되기는 했는데요.(웃음) 당시에 누군가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주고 도움을 줬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텐데, 그 시간을 허송세월하진 않았을 텐데, 싶었어요. 다음 사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럼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하잖아요. 

Q.

지금도 상담을 하면서 많은 피해자를 만나실 텐데, 어떤 얘기를 주로 해주시나요? 

A.

브장 많은 피해자가 업계에서 계속 일하려면 고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고소하고 유죄판결을 받아도 피해자에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죠. 입증하기 어려운 데다 해봤자 솜방망이 처벌이라 집행유예로 나오고, 업계에선 활동을 못 하게 할 근거가 없으니 계속 일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참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고 계속 일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내 생존이 먼저니까요. 그런데 고소를 안 하면 주변에선 그 사람이 피해자란 걸 인정하지 않죠. 이런 딜레마에 많이 빠져요. 또, 어디 가서 얘기했다간 소문이 나고 역으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까 봐 무서워서 말도 못 해요.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저한테 털어놓으시죠. 저는 들어주기만 했는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실 때 제일 마음이 아파요.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파요.

Q.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A.

브장 웹툰계에는 성폭력 문제 외에 여성 차별 문제도 심각해요. 고료 차별도 있고 여성 작가를 폄하하는 인식도 있어요. 전부터 순정 만화 작가님들이 그런 상황을 많이 겪으셨죠. 남성 작가들이 앞에서 대놓고 여성 작가를 비하하기도 했고요. 이제는 웹툰계에서도 여성 차별적인 부분을 가시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디담 순정 만화, 소년 만화 잡지가 있던 시대부터 고료 차별이 있었고 지금도 MG* 차별이 있거든요. 실제로 MG 성차별에 관한 실태 조사를 한 내용이 기사로 나온 적도 있어요. 불공정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여성 작가들의 판매량이 적다거나 인기 만화를 잘 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근본적인 성차별 문제가 있다는 점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MG: 미니멈 개런티. 작가가 수익금 일부를 선불로 받고, 추후 발생한 수익을 플랫폼과 배분하는 제도. 

인터뷰 전문은 빅이슈 247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글/양수복

사진/김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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