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경성의 벽돌집, 딜쿠샤를 아시나요?

조회수 2021. 3. 18.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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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행촌동이라 이름 붙은 이 동네 언덕배기에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붉은 벽돌집이 한 채 있다. 

한동안 동네 주민들에게 귀신 나오는 집이라 불렸던 곳. 이것은 1923년부터 지금까지, 근 100년간 그 자리에서 흐르는 시간을 품어온 붉은 벽돌집 ‘딜쿠샤’에 관한 이야기다. 

아시아의 동남쪽,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관한 뉴스가 연일 매체에 오르내리는 요즘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국민의 손으로 이루어내야 할 민주화의 과정이지만, 그 상황을 전 세계에 알려 뉴스를 읽는 모두를 증인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연대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순간에도 그러한 연대의 매개들이 있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때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가 그랬고, 더 멀리는 일제강점기 3.1운동 때 경성에 살았던 앨버트 W.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가 그랬다. 

경성 한복판 외국인 부부의 안식처

이 푸른 눈의 목격자들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장을 기록했고, 이를 세계에 알렸다.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사업가이자 연합통신(Associated Press)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지하 1층~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는 그가 1923년 경성에 거주할 당시 건립한 서양식 가옥. 

딜쿠샤는 ‘이상향’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테일러의 아내 메리 L. 테일러(Mary Linley Taylor)가 지은 이름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약 20년간 아내, 아들과 함께 이곳, 딜쿠샤에 거주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최초의 3.1 운동 기사

1919년 2월 28일. 그러니까 3.1운동 하루 전날, 앨버트 부부의 아들 브루스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이때 앨버트 테일러는 일제의 눈을 피해 간호사가 병원 침대에 숨겨놓은 문서 한 뭉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그것이 기미 독립선언서의 사본임을 바로 알아챘고, 일제의 눈을 피해 병원 밖으로 문서를 빼돌린다. 세브란스병원 지하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후, 환자들의 침상에 숨겼다는 전 세브란스 병원장 이용설의 증언과도 맞물리는 지점이다. 

고종의 장례 행렬 등 당시 조선의 소식을 외신에 알려온 앨버트 테일러는 3.1 운동 관련 기사를 작성한 후 독립선언서 사본을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한다. 그의 동생은 이것을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건너간 뒤 미국에 보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뉴욕 타임스> 1919년 3월 13일 자에 전 세계 최초로 3.1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다.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는 그가 1923년 경성에 거주할 당시 건립한 서양식 가옥.
딜쿠샤는 ‘이상향’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테일러의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지은 이름이다.

외신들은 이 기사를 기반으로 ‘한국이 독립을 선포했고, 평화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3·1운동 관련 뉴스를 이어나갔다.  

앨버트 테일러는 이후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세계에 알리기도 했고, 항일 독립운동을 돕다가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간 감금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앨버트 부부는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기쁜 희망의 궁전이었던 딜쿠샤가 주인 잃은 빈집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붉은 벽돌집

한때 경성에서 손꼽히던 저택이었던 딜쿠샤. 하지만 방치된 덕분에 현재까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광복 전 일제는 딜쿠샤 안의 집기와 기물을 모두 가져갔고, 집의 이력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법적으로 1959년 자유당 조경규 국회의원의 소유였다가, 1963년 군사정권 때 압수돼 국가 소유로 전환된다. 
하지만 정부의 방치로 집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이후 1~2명씩 무단 점거를 하는 이들이 생기더니 시작을 알 수 없는 임대차 계약까지 더해지며 딜쿠샤는 기형적인 다세대 주택으로 변형되어갔다. 

이 집에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는 그렇게 고단한 일상 아래로 사라졌다. 

이 집의 비밀이 풀린 것은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이자 딜쿠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브루스 T.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가 서울을 찾아오면서부터다. 거주민들이 놔둔 장독대에 가려져 제대로 된 단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정초석의 의미도 이때서야 제대로 밝혀졌다.

딜쿠샤의 벽면 모퉁이 화강암으로 만든 정초석에는 깔끔한 서체의 두 줄 문장이 새겨져 있다. 첫 번째 줄에는 'DILKUSHA 1923’이라는 집의 이름과 건축 연도가, 두 번째 줄에는 ‘PSALM CXXⅦ-Ⅰ’라는 <성경> 시편 127편 1절 구절이 선명히 읽힌다. 그 무렵에도 딜쿠샤 안에는 16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소유권 양도 및 거주민 이주 문제들이 해결되기까지 또다시 근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80년 만의 재회, 딜쿠샤 전시관

고증 연구를 거쳐 본격적인 복원 공사에 착수한 것은 2018년. 그리고 3년 만인 2021년 3월 1일, 앨버트 테일러의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전시관의 형태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딜쿠샤 전시관의 총면적은 623.78㎡ 규모.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가구와 벽난로 등을 그대로 재현하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당시 조선 생활상과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 활동 등을 조명하는 여섯 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개별 자유 관람이 아닌, 전문 해설사 동반 관람으로만 운영될 예정이라고. 온라인 사전 예약(yeyak.seoul.go.kr)을 통해서 신청할 수 있는데 이미 3월 예약은 모두 매진된 상태다. 단, 매일 선착순 5명까지 현장 등록이 가능하다. 

딜쿠샤 안에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령 465년의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든다.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들어차 모든 것이 바뀐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1920년대의 풍경이리라. 

강제추방 후 미국에서 평생 조선을 그리워했던 앨버트 테일러.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평소 유언에 따라 우리나라의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죽어서도 이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1923년부터 지금까지, 근 100년간의 시간을 품어온 붉은 벽돌집 딜쿠샤. 

오늘도 앨버트 테일러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방문을 그 대신 단정한 모습으로 맞는다.


글/ 김선미, 사진/ 양경필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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