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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영화 기자다

조회수 2021. 2. 25.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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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Spark) 이야기 좀 잠깐 하자. ‘태어나기 전 세상’에 사는 <소울>의 22는 자신을 부스팅 해줄 불꽃이 없다. 간디나 마더 테레사 같은 내로라할 지도자들도 삐딱한 22의 소울을 구제해주지 못했다. 

매사 심드렁했던 22가 지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건, 재즈 뮤지션을 꿈꾸다 급사해 영혼이 된 음악 교사 조와 동행하면서다. 자나 깨나 재즈 연주자로 살고 싶었던 조에게 불꽃은 다름 아닌, ‘재즈’였다.

<소울> 스틸컷

<소울>은 <위플래쉬>처럼 자신의 나약함을 채찍질하며, 연인도, 가족도, 생활도 모두 희생하며 조가 재즈 뮤지션으로 성취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목적 하나만 보고 달려온 조에게는 ‘워~워’ 잠깐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고, 방황하는 22에게는 그리 대단한 불꽃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을 준다. 

<소울> 스틸컷

이를테면 어느 가을 날, 손바닥에 바람결에 날려 온 작은 낙엽 하나가 참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는 건데, 이게 참 뭐라고, 격하게 설득당한다. 그래, 불꽃에 연연하는 대신, ‘내가 있는 여기가 바다야.’라고 주문을 걸게 해준다. 

22는 그래서 지구에 잘 도착했을까. 충만한 삶을 살고 있을까. 엔딩 크레디트에, 프로덕션 기간에 태어난 픽사 스튜디오 직원들의 아기 이름까지 하나하나 명시할 정도로 이름 잘 챙기는 픽사가, 무려 장편영화의 주인공 이름을 고유명사가 아닌 22로 떡하니 지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소울> 스틸컷

22를 이름 대신 나이로 치환해본다. ‘태어나기 전’이 물리적 의미의 내가 아니라, ‘사회적인 자아를 찾기 전’의 나. 아직 미래를 규정하지 못하던 때, 원하는 직업을 갖기 전, 아니 원하는 일이 무언지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 나를 온전히 불타게 해줄 불꽃을 찾아 헤매던 그때! 

이름에 책임질 수 있는 기사를 쓰길 바랐고, 그 목적을 향해 오는 동안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했다.

20대 초반의 나에게 불꽃은 ‘영화 글쓰기’였다. 영화를 보고 내 바이라인을 단 글을 매체에 기고하는 게 꿈이었다. 그렇게 지난 시간 영화 주간지 <씨네21>에서 13년, 앞서 영화 주간지 <필름2.0>과 <무비위크> 기자 활동을 더하면, 매체 소속 기자로 생활한 지 20년이었다. 20대에 가졌던 마음속 작은 불꽃이 경력을 더하면서 점점 커져 ‘불멍’을 해도 될 만큼 활활 타오른 시간이기도 했다. 이름에 책임질 수 있는 기사를 쓰길 바랐고, 그 목적을 향해 오는 동안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했다.


처음이지만 괜찮아

지난해 초 나는 20년간 잡지 기자의 페이지를 과감히 접었고, 지금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베이스로 일하지만, 이젠 적용 범위를 한껏 넓혀나가고 있다. 기사를 쓰고, 극장에서 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익숙한 일 외에. 

틈틈이 단행본을 쓰고, 글쓰기, 영화 읽기, 배우론 강의를 하며, 종종 <방구석1열> 같은 TV영화 전문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를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다. 영화 모임 ‘넷플연가’에서 모임원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일도 생겼다. 

이미지제공: 이화정

내 이름을 건 팟캐스트 ‘이화정의 전주가오디오’(네이버 오디오클립)도 진행 중이다. 매주 한 지 벌써 1년째다. 최근 친한 동료들과 함께 진행하는 영화 유튜브 채널 ‘무비건조’를 시작하기도 했다. 

작년부터 성평등한 한국 영화를 만들기 위한 영화제 ‘벡델데이’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고, 2회 행사를 준비 중이다. (코로나19로 작년엔 네이버 V라이브로 비대면으로 만났는데, 올해는 여러분과 직접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제공: 이화정

공교롭게도 내가 매체 기자로 소속을 그만두는 동안 영화 저널의 형태도 급변하고 있지 싶다. 지면이 우세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플랫폼이 다변화되고 있다. 나를 이 망망대해, 거대한 파도타기로 이끈 것도 물론 이 흐름이었다. 

내 이름은 하나지만, 독자, 청취자, 방청객, 관객, 구독자 등으로 만남의 대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아졌다. 퇴사 후 1년간 내 시간을 돌아보니 영화를 토대로 접점을 가질 수 있는 관계망이 넓어졌다는 걸 실감 중이다.

사진제공: 이화정

잡지 기자로 생활하면서 마감을 하고 기사 바이라인에 내 이름을 올릴 때마다 나를 설명하는 건 내가 속한 매체가 먼저였다. 그렇게 익숙한 수식을 뗀, ‘이화정’이라는 이름을 누군가 선뜻 받아들여줄까, 스스로 어색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나’라는 매체로 자신 있게 발을 디딘다. 

조회 수와 구독자 수, 시청률 같은 지표에도 한참 민감해지는 때, 마침 도착한 <소울>을 생각한다. 지난 20년 동안 매주 목요일 마감을 하는 동안,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고,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 루틴 하나하나가 즐거웠고 보람찼다. 

그 시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제 성취에 앞서 이 버라이어티한 일들에 책임질 수 있는, 새로운 나의 루틴을 꾸려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년 주간지 마감 지구력으로 신설한 ‘무비건조’ 유튜브도 꾸준히 업데이트할 테니, 부디 많은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린다.(꾸벅)


글/ 이화정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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