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진행형 전설, '아르미안'의 신일숙 작가

조회수 2021. 2. 10.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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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기자가 인터뷰한 신일숙 작가

순정 만화로 역사를 배우고 우주를 꿈꾸고 혁명을 배웠다. ‘순정’이라는 명명 때문에 폄훼되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순정 만화는 10대 여성 독자들의 문화생활을 좌우하는 당당한 여성 서사였다. 상업적 고려가 최우선인 요즘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무참한 비극 역시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들의 사랑과 원망을 받던 때였다.


그중에서도 동양 신화를 보는 듯하던 '불의 검', 프랑스혁명을 다룬 '테르미도르'를 그린 김혜린과 미래 종말을 앞둔 인류를 담은 SF '1999년생', 모계사회의 여왕과 그 딸들의 이야기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그린 신일숙, 현실적인 고교 성장물인 '17세의 나레이션'과 유려한 드라마가 돋보인 SF 경찰물 '라비헴 폴리스'의 강경옥, 이 세 작가는 8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0여 년간 신드롬이 이룬 한국 여성 작가의 여성향 만화의 중심에 있었다. 


거북이북스에서 북 펀드를 통해 재출간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트로판 20권 세트는 펀드로만 1억 원을 돌파(124,676,800원)하며 그 시절 만화를 읽던 독자들의 애정이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웠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많은 독자들의 인생작이에요.” 하고 말을 전하자, 신일숙 작가 본인에게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작품 하기를 참 잘했다 싶죠. 이 작품 할 때 무척 힘들었거든요.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고, 많은 돈을 번 작품도 아니에요. 인생 작품이라는 독자들의 말이 아주 고맙죠. 진짜 인생 작품.”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일러스트.

Q.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연재하시던 동안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새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작가님께는 마감의 고통으로 기억되는 시간이었을까요? 

A.

출판 만화, 단행본으로 만화를 내던 시절이라서 지금 같은 마감이라는 개념은 없었어요. 제가 마무리해서 원고를 가져가면 그게 마감이었어요. 한 권당 석 달을 넘기지 않으려는 기준은 있었죠. 보통은 두 달 좀 넘겨서 한 권.

Q.

이메일이나 댓글이 없던 시절인데 독자 반응을 어떻게 접하셨어요?

A.

팬레터뿐이었어요. 출판사로도 오고 집으로도 오고 팬레터가 꽤 많이 왔어요. 내용을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자기 일기를 써서 보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냥 자기 얘기를 써서 보내시는 거죠. ‘많은 사람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나요. ‘나도 작품을 통해 내 얘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Q.

사실 작가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제일 중요한 목적은 내용 전개에 대한 청원이잖아요.

A.

네. 주로 들은 간절한 얘기는 미카엘을 죽이지 말라는 거였어요.

Q.

그런 부탁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나요?

A.

전혀.(웃음)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미안하지만 이 부탁은 들어줄 수 없는데…’ 했죠.

<아르미안의 네 딸들> 1권의 주요 장면.

Q.

작품을 시작하실 때 내용 전개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정하고 시작하셨나요?

A.

시작할 때 전체 공사의 규모를 결정하죠. 경부선 공사를 예로 들면 정차해야 할 주요한 역을 먼저 잡아두잖아요. 그 길을 따라 나머지 역을 몇 개 만들지 정하고. 그런데 철로를 놓다 보면 굴을 뚫어야 할 때도 있고 다리를 놔야 할 때도 있어요. 산을 돌아서 갈지 관통해서 갈지도 정해야겠죠.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처음에 뼈대는 다 결정되어 있는데, 가다 보면 예상 밖의 지형지물이 있어서 고비를 통과하는 과정이라든가 다음 역까지 도달하는 경로 등을 정하면서 가죠. 

Q.

결말과 분량은 애초 예정대로 진행된 경우인가요?


A.

결말은 예정한 대로. 책 분량은 공사 기간처럼 예정에 맞추는 일이 순조롭지 않죠. 어떤 인물을 살리기 위해서 관련 스토리를 만들잖아요. 그러면 그 부분의 스토리가 커지는 거예요. 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에피소드가 추가돼요. 그러면 결말은 결정되어 있는데 중간에 자꾸 다른 곳으로 새니까 이야기를 쳐내는 일이 중요하죠.

Q.

작가님께 만화의 즐거움을 알게 한 10대 시절의 기억은 누구에게서 비롯되나요?

A.

제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전에 순정 만화라는 게 있긴 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순정 만화라는 장르가 아예 없어졌어요. 그런데 남자 만화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아니면 명랑 만화였는데 그것도 보면 재미있지만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단행본 유통과 관련한 총판 문제가 있었고, 순정 만화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책이 아예 안 나오던 거였어요. 그 뒤 '캔디 캔디'가 인기를 끌고 일본 만화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서 순정 만화가 부활하게 된 거예요.  

신일숙 작가.

Q.

작가님께서 만화가로 작업을 시작하신 때는 한국 순정 만화들이 창작되던 초반이었을 텐데, 만화가로 살아가기로 정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A.

당시에 황미나 작가가 이미 시작한 상황이었어요.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도 있었고. 나도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뛰어든 거죠. 습작 시절이 있기는 있었어요. 2년 정도.

Q.

역사 판타지 장르를 많이 그리셨는데 이 장르를 좋아하신 이유가 있나요?

A.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했을 거예요. 작품이 주로 길어서 상상의 세계에서 좀 오래 살았어요. 역사에 대해 생각하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잖아요. ‘고대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는데 왜 중간에 없어졌을까?’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까지 마쳤는데 학교에서는 이런 생각을 펼칠 기회가 없었어요. 이런 얘기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없었으니까. 당시에는 학생이 너무너무 많아서 선생님들도 역사 같은 과목은 기계적으로 때우듯 수업하고 나가버리셨어요. 질문해도 달가워하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제 나름대로 혼자 다 생각해야 했어요. 지금은 인터넷이 있으니까 뜻이 맞는 사람과 얘기할 수 있지만, 답답한 세월을 지내다 보니 혼자서 상상하며 많은 구멍을 메웠어야 했어요. 궁금증이 많았죠.

Q.

만화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A.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했어요. 저는 차멀미가 무척 심한데 출근하는 데 버스로 한 시간 반, 퇴근하는 데 한 시간 반이 걸렸어요. 출퇴근하면 한 시간씩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게다가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그때그때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무척 힘들고 괴로웠어요. 돈을 적게 벌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던 차에 회사가 도산해서 직장을 새로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죠. 그사이 1년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 2권의 주요 장면.

Q.

'리니지'는 게임으로도 워낙 큰 성공을 거뒀잖아요. 작가님도 '리니지' 게임을 해보셨는지 궁금했어요.

A.

네, 해봤어요.

Q.

잘하시나요?

A.

잘하죠. 캐릭터 몇 개를 다 만렙으로 올려놨는데.

Q.

같이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신일숙 작가님인 줄 모르죠?

A.

모르죠. 나이를 속여요. 그래야 같이 놀아주거든요.(웃음)

Q.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는 여성 독자들은 극 중 남자들 중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인지 따지기보다 여자들 중 누가 자신과 비슷한지를 더 많이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작가님도 더 감정이입을 하거나 본인과 닮았다고 느낀 캐릭터가 있나요?

A.

사람들은 제가 첫째 ‘레 마누아’를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네 딸 모두에 제 성격이 조금씩 투영돼 있어요. 굳이 꼽는다면 ‘샤리(레 샤르휘나)’가 저와 가장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첫째 딸의 모델은 제 언니였거든요. 저와 나이는 얼마 차이나지 않지만 여성스럽고 야무진 성격이라 동생들을 후려잡으려고 했어요. 첫째 레 마누아의 성격에는 제가 좋아하는 부분과 나는 못 하겠다 싶은 부분, 제가 싫어하는 부분이 섞여 있어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 4권의 주요 장면.

Q.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제일 큰 고비는 언제였나요?

A.

만화계가 몇 번이고 허물어졌다가 웹툰으로 지금처럼 성장했잖아요. 만화계의 틀이 바뀔 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작품 활동에서 고비도 그때 왔어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갑자기 판이 흔들려버렸어요. 지면이 없어지면 작품을 할 수 없으니까. 제가 젊을 때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게 좋지 않았죠. 몸도 갑자기 아팠고.

Q.

좋아하시는 웹툰이 있으신가요?

A.

'카야'를 연재하고 있으니까 웹툰을 봐요. 정설화 작가의 '더 콩쿠르', 이경탁 작가가 글을 쓰고 노미영 작가가 그린 '심해수'도 좋아해요. 여러 플랫폼에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봐요. 

Q.

연재 중인 '카야'를 '아르미안의 네 딸들' 팬들에게 직접 소개해주신다면요.

A.

'카야'는 이상 세계를 다루고 있어요.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정서적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것이 발전의 한 형태는 아닐까요. 남의 아픔을 안다면 아무리 위에 올라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자식에게 부가 대물림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불행의 많은 부분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평상시에 인간에 대해서 생각한 것들을 그리고 있어요. 제 인생의 마지막 장편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기교를 많이 넣었어요. 복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전 작품보다 더 나은 작품이어야 저 자신부터 만족하기 때문에 그만큼 노력하고 있어요. 저와 함께해온 독자들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길 바라며 시작한 게 '카야'예요.

Q.

작가님 사진 중에 고양이랑 같이 찍은 사진들이 있더라고요. 몇 마리와 같이 살고 있나요?

A.

지금은 다섯 마리랑 함께 살아요. 여섯 마리였는데 재작년에 한 마리가 죽었어요. 나이가 제일 많은 아이부터 차례로 신이, 진주, 나루, 밍키, 니키. 만화 주인공 이름이 많죠. 니키는 나이키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고요.

글/이다혜

사진/거북이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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