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동상들

조회수 2020. 12. 17.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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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경우, 어떤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싶어 하는 측에서 가장 적지라고 생각하는 자리는 첫째가 남산이었다. 남산식물원 앞이나 팔각정 앞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에 나오는 말이다. 남산은 조선신궁 터를 탈환한다는 역사적 의미, 서울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시민들이 많이 찾아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정치 선전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남산에 난립한 동상들이 그 증거이다.

백범 김구 동상

남산 백범광장 주변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모여 있다. 해방 직후 가장 먼저 동상의 인물로 거론된 이는 독립운동가의 대명사와 같았던 안중근 의사다. 


1946년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 사업이 추진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59년 5월 23일 일본군 주둔지였던 남산 왜성대 자리에 최초 건립되었다. 


지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은 2010년에 재건립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구름다리로 이어진 백범광장에 역시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동상과 성재 이시영 동상이 서 있다. 

성재 이시영 동상

백범 김구 동상은 그의 93회 생일에 맞춰 1969년 8월 23일에 건립되었다.(이날 동상 제막식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은 남산음악당 앞 광장을 백범 광장으로 명명하겠다고 선포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립에 참여해 초대 부통령이 된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은 1988년 백범 김구 동상 왼편에 건립되었다. 

다산 정약용 동상

1956년 8월 15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장소는 지금 백범 김구 동상이 있는 그 자리였다. 이 동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워졌다. 모든 동상이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갖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은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당시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더 노골적으로 숭배와 찬양의 의도를 품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이어 발생한 4.19 혁명 때 시민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그 이후 해체되었다.

도산 안창호 동상

마지막으로 남산에는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세운 동상들이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체제 안정과 국민 통합을 위해 추진한 문화 정책의 일환이다. 


김종필이 총재로 있던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에 의해 “우리 민족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 15인이 발굴되어 서울 곳곳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퇴계 이황 동상

1970년 다산 정약용 동상과 퇴계 이황의 동상이 애국선열 조상 건립 위원회에 의해 남산 서울특별시립도서관 앞에 건립되었다. 두 인물 모두 조선 시대의 문인이자 학자로,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로서의 업적이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맞아떨어졌고 퇴계 이황은 청빈함이 칭송되었다. 


백범 광장 서쪽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은 1969년 시청 앞 광장에 세워졌다가 1971년 지하철 1호선 굴착 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삼국 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민족 통일 담론을 투사하기 좋은 인물이었다. 

김유신 동상

모든 동상은 목적을 가진다. 남산의 동상들도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남산의 동상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동상이 담은 메시지가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욕이 된다. 식상증을 일으키는 것이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무질서하게 세워진 숱한 동상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철거, 폐기 또는 이전을 검토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손정목, 2003.

글, 사진/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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