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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친구네 집에서, 우리

조회수 2020. 12. 4. 13: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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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위로하는 방법을 고민한 2020년이었어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위로를 하고 싶기 때문이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조차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요. 반면 어떤 친구가 우울을 내비치면 무작정 그의 집으로 찾아가고 싶어요. 


그러곤 떠오르는 음식을 배달시켜 배불리 먹고 집을 잔뜩 어지럽히고 싶어요. 가능하면 내 애인과 강아지도 데리고 가서 소개하고 싶어요. 본능적으로 먹고, 웃고, 좋아하는 것들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정신을 쏙 빼놓고 함께 떠들고 난 자리의 청소나 설거지 따위도 즐거운 숙제로 느껴지게 하고 싶어요. 


그런 날엔 바짓부리에 달려 따라온 노오란 낙엽 하나를 보면서도 문득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늦가을 비에 젖은 낙엽 하나 데리고 돌아온 날, 나를 기다려준 집, 가족, 반려 동식물에게 오늘도 잘 돌아왔다고 한 마디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그럼, 노오란 개나리가 다시 필 때까지 긴 겨울에도 모두 잘 지내기로 해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다가 노란색을 좋아하는 네가 생각났어.

어릴 때부터 노란색을 좋아했어. 하지만 그땐 지금처럼 표현하진 못했어. 노란색은 남자애가 좋아하면 안 되는 색 같았거든. 유년 시절에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못해서 결핍이 있나 봐. 지금은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안 하니까 마음껏 표현하고 있어.

너는 완벽에 집착하는 사람 같아. 인스타그램에 노란색만 올리는 계정을 만든 것만 봐도. 가끔은 네 그런 성격이 너를 더 고립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 자기애가 넘친다고 종종 농담처럼 말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전화번호부도 자주 정리한단 말이야.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50개가 채 되지 않아.

네가 칭찬할 때 종종 ‘올해의 OOO다’라고 말하잖아. 작은 것에도 의미를 두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그중에서 네게 가장 의미 있는 건 뭐야.

요즘은 친구.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백수로 생활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닥을 쳐. 지난주에 하루에 면접을 두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 따라 기분이 헛헛한 거야. 집에서 혼자 밥 먹을 생각을 하니 왠지 서글퍼서 동네 친구에게 무작정 연락했어. 언제든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살 만한 삶이라고 생각해.


네가 아끼는 사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가수 요조 같아.

대답하기 좀 난감한 질문이네. 자칫 본인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잖아.

알았어. 그럼,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야.

요조지 당연히.(웃음) 그녀가 운영했던 계동 ‘책방 무사’의 영향이 컸어. 사실 그 전에는 재주 많은, 홍대 인디 음악 하면 떠오르는 아티스트 정도로 알고 있었어. 그러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 살아서 북촌에 자주 가던 때가 있었거든. 그날 따라 아주 우연하게 발길이 그곳에 닿았어. 

그날의 모든 게 완벽했어. 책, 분위기,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서점까지. 그때 요조가 차를 한 잔 내어줬는데 참 따뜻했지. 그 이후로도 요 사장님이 있으면 꼭 차를 얻어 마셨어. 

그때부터 독립 서점에 애정이 생겨서 이후에 ‘땡스북스’라는 서점에서 일하게 됐어. ‘나도 언젠가 이런 서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그녀는 내게 늘 동경의 대상이야.

팬심의 대상이자 닮고 싶은 사람. 이 이야기를 수백 번 하고 다녀도 그녀라면 좋아하지 않을까.

요조는 나를 ‘봉수 씨’라고 부르고 나는 ‘선배님’이라고 불러. 누나라고 하기엔 낯간지럽고, 언니가 입에 딱 붙긴 하지만 차마 못 부르겠어. 그래도 선배라는 호칭을 귀여워한다는 걸 어쩌다 알게 되어서 안심하고 있어. 그리고 요조의 청춘 에세이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에 나를 오랜 팬이자 ‘친구’라고 써줬어.

‘관종’이라고 부르는 것도 본 것 같아.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멋쩍은 거야. 장난스럽게 당일에 보내면 왠지 여러 메시지 틈에 묻힐까 봐 하루 전날 미리 보낸다고 했더니 ‘관종’이라고 하시더라고. 그때까진 부정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 그렇게 불러주니까 하나의 캐릭터가 된 것 같고 재밌는 거 있지.

처음 독립하면서 어떻게 연희동에 살게 됐어?

한곳에 오래 살면서 ‘고인 물’이 된 기분이었어. 난 서울에서 자랐지만 상경한 친구들이 흔히 말하는 서울에 대한 로망이랄까. 대학생이 된 후 자주 가던 종로, 마포, 용산 중 한 곳에 독립하고 싶었어. 

대학만 가면 근사하게 독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때는 내가 이 동네에 살아서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어. 그래서 더욱 다른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더라. 집을 구한 뒤에 가족들 몰래 야금야금 이사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하나부터 열까지 결정한 일이라 큰 용기가 필요했어.

네 집이 네가 좋아하는 색깔을 잃지 않게 하려는 네 모습이 떠올라.

종로, 마포, 용산을 거쳐 이 집이 아홉 번째야. 발품을 아주 많이 팔았어.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방이 많더라고. 이 집을 구하기 직전 보광동에 집을 보러 갔을 때는 터무니없는 집 상태를 보고 그만 포기하려고 했지. 

그러다 한 친구가 인터넷에서 이 집을 보고 나랑 잘 어울린다며 권하기에 가보니 유니크한 구조가 마음에 들더라. 창문이 난 아기자기한 주방이나 싱글 침대가 쏙 들어가는 공간을 보고 바로 여기다 싶었지. 집 자체가 예쁘니까 인테리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으로 채웠어.

서점에서 오래 일한 네가 책장을 정리하는 방법이 어떨지 궁금해.

가장 먼저 책들의 높이를 가지런히 맞춰. 정갈하게 놓기 위해 자주 솎아내지. 그리고 국가별, 작가별로 칸마다 섹션을 나눠. 한눈에 들어와야 내 책장 같아. 책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만화책인데 학창 시절 추억이라서 못 비우고 있어. 애정에 유통기한이 있지만 최대한 유지하는 게 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만화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

내 첫사랑 상대가 만화 <원피스>를 사서 읽는 모습을 보고 반했어. 우리 어릴 때는 보통 만화책을 빌려서 읽었잖아. 나도 만화책을 사서 읽으면서 그 친구의 관심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 너는 쓰는 사람보다 읽는 사람에 가까울 것 같아.

내가 순수한 독자라면 쓰고 싶은 욕망도 없겠지. 하지만 한때는 나도 문학을 공부했으니까 쓰고 싶은 미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 <내일의 연인들> 같은 좋은 소설을 읽으면 ‘왜 이렇게 쓰고 싶지?’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안 쓸 거 아는데. 나 안 쓰고 싶은 거 맞고. 정말 안 쓸까? 이대로 써보면 잘 써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런 겸허한 말과 태도는 오랜만에 듣고 보는 것 같아.

학교 다닐 때 시 선생님에게 “쓰는 건 어려우니 좋아만 하면 안 되나요?” 하고 투정 부린 적이 있어. 선생님이 정색하시며 “잘 읽기는 쉬운 줄 아니!” 하셨던 게 잊히지 않아. 읽는 것도 시간과 관심 있어야 가능하잖아. 과연 내가 서점에서 일을 안 했어도 꾸준하게 책을 곁에 두고 좋아할 수 있었을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돼.

영원한 독자가 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해. 나는 독자로서 삶을 영위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그러다가도 너무 좋은 책을 읽다 보면 또 되게 쓰고 싶어. 뭐가 더 있지 않을까. 계속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아. 요즘의 나는 체념한 듯해. 세상에 읽을 게 이렇게 많은데 내가 뭘 더 보탤 수 있을까?


글/ 정규환, 사진/ 이규연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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