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무는 동네, 망원동으로 나들이를

조회수 2020. 8. 24. 09: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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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동네는 어디인가

망원동을 구석구석 걷다 지칠 때쯤 나타나는 유수지. 언제나 축제 같은 한강공원 잔디밭의 사람들과 달리 유수지엔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로부터 한강과 인접한 망원동은 홍수가 잦았다고 택시 기사분들의 구전으로 종종 들은 적이 있어요. 


유수지는 홍수 때 강의 수량을 조절하는 저수지 역할을 합니다. 이제 홍수가 날 일은 없으니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겠죠. 이 유수지를 지나쳐 골목을 돌면 내 친구 세봉이의 집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친구가 됐잖아.

평소 누구와 여행을 하는지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방콕처럼 아름다운 휴양지의 호텔에 있더라도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랑 있으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집 앞에 산책을 나가더라도 마찬가지야. 


‘누구와’가 해결되면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 순간을 재밌게 만들 자신이 있거든. 마음 맞는 친구와는 구린 영화를 봐도 행복한 거야.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음식은 맛있는 게 중요해.(웃음)

망원동엔 어떻게 이사 오게 됐어.

2016년 9월에 이별과 이직이 동시에 찾아왔어. 이사를 준비하면서 회사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보다가 자연스럽게 망원동에 오게 됐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당시는 망원동이 핫해지기 시작하는 무렵이기도 했고. 아티스트들도 많이 살고 작업실도 많아서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어. 

침대 옆에 있는 이 그림은.

이건 엄마가 대학생 때 그린 그림이야. 엄마는 예전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 이제는 몇 점 안 남은 엄마 그림 중 하나야. 어릴 때부터 이 그림을 유독 좋아했는데 뭘 그린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 


바나나 같기도 하고, 미로 같기도 하고. 내가 독립하면서 액자는 아빠가 해주셨어. 초록색이라 눈이 편안하고 인테리어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침대 옆에 뒀어.

젊을 때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니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잖아.

예전엔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물렁물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고 그 사람들과 섞였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만의 정체성이 생기다 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되더라고. 


한편으론 덜 다양해진다고 볼 수 있어. 그래도 사람을 더 만나봐야 안다는 데는 동의하는 편이야. 함부로 단정 짓진 않지만 나만의 느낌이 있다는 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든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우리가 사랑의 의미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네게 종종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 안에 조금은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친구한테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가족이나 연인에게는 잘 못 하는 편이야. 전 애인에게는 3년간 만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근데 희한하게 사랑한다고 말을 많이 할수록 사랑스러워진다! 


그때까진 나도 그 말을 못 들어서 못 한 것도 있어.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나도 말할 수 있게 됐어. 어떤 넓은 의미에서 연대감, 유대감 같은 것도 사랑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4년 동안 살고 최근 이사하려고
알아보다가 남기로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

그사이에 집값이 너무 많이 올랐어. 현시점에서 이사를 가려고 알아보니까 돈이 다 합쳐도 이 집하고 별반 다를 게 없는 수준이더라고. 


주거 환경을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하려면 내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었어. 그래서 이사하는 대신 이사 비용과 거기에 들이는 에너지를 이 집에 투자해서 정을 들이기로 했어. 


세봉이와 친해진 계기는 파리 여행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 낯선 곳에서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어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처럼요. 인생에서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찾아올까 하는 낭만적인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서울 따릉이의 원조 격인 파리 벨리브를 타고 에펠탑에서 몽마르트르 언덕까지 숨차게 페달을 밟고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습니다. 


돌이켜보니 그의 말처럼 완벽한 순간은 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망원동에서 바라보는 한강을 넘어가는 한여름 노을도 역시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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