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 폭격기가 초호화 여객기로 변신했다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여파로 미국은
작전 반경과 폭장량을 대폭 늘려
개발 준비 중이던 B-29 폭격기를
당시 가장 많은 비용을 투입해
신속히 완료해 1945년 5월부터
작전에 투입하게 된다.
B-29는 일본 본토 융단 폭격과
인류 최초의 핵폭탄 투하까지
전략폭격기의 대명사로 활약하며
1946년까지 3,970기가 생산된다.
이전 B-17이나 B-24의 3배인
최대 9.1톤의 폭탄 탑재와
최장 9,000km의 비행 거리,
9,710m의 최대 고도와
570km의 최대 속도 등
기존의 모든 기록을 초월하는
비행 성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장착된 여압 장치는 탑승자에
방한복과 산소마스크 착용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비행의
편의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보잉은 B-29 폭격기를 기반으로
군용 수송기 C-97을 만든다.
B-29의 날개와 엔진, 부품 등과
하부 동체까지 그대로 사용하였고
더 큰 원통을 상부 동체로 얹어서
다소 희한한 중첩된 형태가 됐지만
적재 공간은 더욱 확대되었다.
C-97은 한국전쟁에서도 사상자를
대피시키는 데 사용되었고
공중급유기로도 개조해 활용되었다.
크고 빠르며 장거리가 가능한
B-29 폭격기의 성능에 주목한
보잉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용 생산 감소에 대비해
프리미엄 서비스 민항기인
보잉 377 Stratocruiser를
상업 시장에 내놓게 된다.
보잉 377은 중첩된 원통 형태인
C-97의 동체 디자인을 공유해
언뜻 보면 B-29 파생형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보잉 377은 현대의 대형 여객기에서
볼 수 있는 더블 데크와 기내 라운지를
구현해 선구적인 운송 수단으로
주목 받으며 높은 판매 실적을 올렸다.
넓은 객실과 고급스러운 탈의실
슬리핑 버전에는 28개의 이층 침대
원형 계단 복층의 라운지 구역 등
보잉 377은 호화로운 비행기 여행을
승객들에게 선보였다.
신형 비행기의 런칭 고객인 팬암은
1949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호놀룰루까지 항공편을 시작했다.
여러 항공사에 의해 6년 만에
3,199,219명의 승객을 운송했고
273,362,494km을 비행했다.
당시 가장 고급스럽고 진보한
프로펠러 구동 비행기로
승객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엔진 및 프로펠러의 잦은 고장,
더 높은 유지 보수 운영 비용에
더해서 60년대 제트기 시대가
도래하며 불과 10여 년만에
보잉 377은 빠르게 퇴출되어
비교적 단명한 비행기가 됐다.
운항을 마감하고 수명을 다한
보잉 377 중 일부는 매각되어
에어로스페이스라인즈사에 의해
화물수송기 구피(Guppy) 시리즈로
다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구성 및 제작 / 디지틀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