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악의 참호전 현장을 가다: 프랑스 알베흐 솜 전투 박물관

조회수 2018. 9. 20. 14: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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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더볼트의 밀리터리 여행>
참혹한 참호전의 모습

참호전(Trench War). 인류 역사상 가장 이상하고 잔혹한 전투 양상을 말합니다. 참호전은 양측 모두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한 뒤 상대방 참호를 향해 돌격하는 전투입니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대규모 병력이 자신의 참호를 뛰쳐나와 돌격하여 기관총에 산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미친’ 짓은 대전 내내 반복되었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만 기술력이 어중간하게 발전한 당시에는 육탄 돌격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참호전이 가장 두드러진 전투가 바로 솜 전투(Battle of Somme) 입니다. 

슐리펜 계획 작전도

유럽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독일은 항상 양면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 결전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독일이 가장 원하던 바였습니다. 독일은 전쟁 초기 프랑스의 주력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벨기에를 우회해 파리를 점령하는 작전을 수립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리 수립한 슐리펜 계획을 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독일의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초기에 빠른 진격으로 프랑스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파리를 눈앞에 둔 마른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프랑스군에 가로 막히게 됩니다. 결국 마른을 뚫지 못한 채 독일군은 전선을 뒤로 물렸습니다.

솜강 유역
1916년 확장된 서부 전선

마른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비교적 연합군의 압력이 적은 프랑스 북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파리를 앞에 형성되어 있던 전선은 어느새 도버 해협까지 연장됩니다. 프랑스 북부의 대도시 아미앵과 생커탕을 흐르는 솜 강 인근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웠던 독일은 역습에 대비하여 점령한 땅에서 참호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연합군도 독일이 다시 공세로 전환하는 것을 대비하여 참호를 파게 됩니다. 이렇게 악명 높은 참호전의 기반이 솜 강을 끼고 만들어졌습니다.

알베흐의 모습

솜전투의 시발점이자 최전선이었던 알베흐에 찾아갔습니다. 도시라고 부르기엔 조금 작은 곳으로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건물들이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강력한 포화에 알베흐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기에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듯 합니다.

솜 전투의 흔적

가장 참혹한 전투를 치른 곳인 만큼 알베흐 곳곳에서 1916년 솜전투를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알베흐 역과 철도

과거의 전쟁들과는 확연히 다른 총력전, 참호전을 만든 것은 철도의 발달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인력과 가축에 의존한 수송은 한계가 명확하지만 철도가 등장하며 후방에서 무제한적인 물자 수송이 가능해졌습니다. 아무리 많은 인명과 물자가 소모되어도 철도로 보충하여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르담 드 브레비어

알베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대성당입니다. 성당 탑 위에서 빛나는 황금 성모상이 알베흐의 상징입니다. 이 성모상에는 한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매달린 황금 성모상

알베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 포탄이 성당을 강타해 성모상이 쓰러졌습니다. 성모상이 탑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상태를 몇 년간 유지하자 ‘황금성모상이 떨어질 때 전쟁이 끝난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1918년, 독일의 마지막 공세 전투에서 성모상은 떨어졌고 바로 그 해,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소문이 전설이 된 순간입니다.

솜 전투 박물관

성당 지하에는 솜 전투 박물관이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당시 군장을 갖춘 마네킹들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관람실 입구와 지하 갱도

솜전투 박물관은 박물관 전체가 지하 갱도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치 참호와 박물관을 일체화 시킨 듯한 분위기가 관람객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100미터 길이의 갱도 좌우로 전시품과 당시 참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호전의 재현

좁은 지하에 재현된 당시의 상황을 보니 정말로 1916년 참호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잠깐 관람하는 동안에도 답답함과 불쾌함을 느꼈는데 더 열악한 참호에서 포탄 세례를 받으며 생활해야 했던 병사들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칩니다.


보몽아멜 뉴펀들란드 기념 공원

알베흐 외곽에는 솜 전투에서 희생되었던 부대들의 추모 공원(Beaumont-Hamel Newfoundland Memorial)과 보존된 참호들이 함께 있습니다. 보몽아멜은 영연방 캐나다군의 뉴펀들랜드 연대가 맡았던 지역입니다. 연대의 마스코트인 순록상이 마치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참호

마침 제가 이곳을 방문한 2016년은 솜 전투 이후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당시의 참호와 포탄 자국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최전선

독일군의 최전선 참호에서 영연방군의 최전선 참호(사진 정중앙 나무)를 바라본 사진입니다. 두 참호의 거리는 100미터. 당시 병사들은 이런 개활지에서 기관총탄과 포탄을 뒤집어쓰며 상대방의 참호까지 달려나가야 했습니다. 뉴펀들랜드 연대는 이곳에서 솜 전투가 개시된 지 20분도 안 되어 전체 병력의 80퍼센트를 잃었습니다. 철조망과 수많은 시체, 불발탄 때문에 그대로 참호 사이에 돈좌되어 산화하였습니다.

솜 전투의 경과

7월 1일에 개시된 솜 전투는 그해 11월 18일이 되어서야 막을 내립니다. 개전 당일 뉴펀들랜드 연대와 같은 상황에 처한 부대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사단 병력 단위의 인명 피해가 매일같이 이어졌습니다. 연합군이 5개월간 진격한 거리는 고작 12킬로미터였고 양측 사상자는 최대 120만 명. 전선이 1킬로미터 움직일 때마다 솜의 참호에는 10만 명의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전사자 묘비들
부대별 추모관

워낙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기 때문에 솜에는 부대 또는 사단별로 공동묘지와 추모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묘비들을 보며 인류 최악의 전투의 참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록나가 크레이터

당시 지휘관들은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촘촘히 구성된 방어선을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솜 전투 개시 당일 독일의 방어선을 한번에 철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전에 터널을 뚫어 독일군 진지 아래에서 수십 톤의 폭약을 터트려 진격로를 개척하려 했습니다. 핵무기가 개발되기 이전 가장 큰 인공 폭발이 이렇게 발생하게 됩니다.

추모비와 크레이터

7월 1일 새벽, 지름 90미터의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연합군은 작전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이정도의 폭발로도 독일군의 종심 방어선을 약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분명 거대한 크레이터이지만 넓은 전선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작았습니다.

최초의 전차 마크1 ‘마더(Mark1 ‘Mother’)가 1916년 가을 솜에 등장하였습니다.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연합군과 동맹군 모두 수없이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의 결과는 ‘전차’라는 열매로 탄생하게 됩니다.

『탱크 북』 22~23쪽에서 Copyright © Dorling Kindersley

글쓴이 손건(썬더볼트)

기계 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발전소 엔지니어로 재직 중이다. 역사, 밀리터리, 자동차에 관련된 컨셉으로 각국을 탐방하는 아마추어 여행가이자 사진 작가이다. 루리웹과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night_thunderbolt)에 여행기를 쓰고 있다.


제공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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