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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잊혀진 국군포로의 잊혀진 딸들.. 그들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돌려보내지 않은 한국군 포로는 약 6만 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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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 포로 대부분이 송환됐지만 다수의 한국군 포로들은 북한에 계속 억류됐다

출처US Air Force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돌려보내지 않은 한국군 포로는 약 6만 명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태어나 '괴뢰군'의 자식으로 갖은 차별을 견디며 한국으로 넘어온 국군 포로의 자녀들은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절망한다.

"이 반동아, 괴뢰군아! 너네 나라 가라!" 최 씨는 40여 년 전,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들었다고 회고한다.

최 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으로 싸우다 포로로 잡혔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괴뢰군'의 자식들은 북한에서 최하층의 삶을 살아야 했다.

최 씨는 당시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 북한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나이인 열일곱 살이 됐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진학할 수가 없었다.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화를 내는 딸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까닭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우리나라가 그때 너무 힘이 없었어… 그래서 못 찾아간 거야.'" 최 씨는 BBC 코리아에 말했다.

"'정전협정 도장 찍을 때 이쪽에서는 북한군하고 중국군이 나갔는데 남조선 군대는 나오지도 않았어. 미군이 왔어. 미군이 우릴 안 찾아갔어. 대한민국이 힘이 없어서, 그때 나라가 참 어려웠어. 그래서 못 찾아갔지, 우리 아버지들을 버린 게 아니야.'"

최 씨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이튿날부터 아버지를 따라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렇게 8년을 아버지와 같이 함경북도 온성군의 탄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충청도 분이어서 말을 천천히 하세요." 최 씨는 말했다. "지금도 막 화를 내다가도 아버지의 그 목소리가 들려요."

돌아오지 못한 6만 명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8300명가량.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포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6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토록 많은 수의 국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은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일성이 포로 전부를 송환시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발굴된 소련 외교문서에서 드러난다. 정전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9월 김일성이 스탈린과 중국군 지도부와 가진 회의 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2만7000명의 한국군 포로를 비밀리에 인민군으로 편입시켰다고 말한다.

판문점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국군 포로는 8300명가량이었다

출처대한민국 육군

2014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송환되지 못한 국군포로 대부분은 북한 최북단 지역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1956~57년 민간인으로 전역한 이후에는 오지의 탄광촌에 보내져 죽을 때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출신성분 때문에 '탄광행'

탄광의 작업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이나 중상은 매우 흔했고,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광부들의 20%는 은퇴연령인 60세를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은 함경북도 경흥군(현재는 은덕군) 출신의 이 씨의 회고다. 이 씨는 2004년 탈북해 한국에 왔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어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이 공개되는 걸 원치 않았다.

"우리 남동생이 탄광 들어갔다 나오면… 이제는 더는 자기는 일 못하겠다. 배고파서도 그렇지만 그 굴 안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못한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폭발하고 가스 터지고 굴이 무너지고 이러니까, 사람 죽어나가고."

출신성분 때문에 국군포로의 아들도 탄광행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언급한 최 씨의 경우, 자신이 탈북한 후인 2013년에 자신의 조카가 19세의 나이로 탄광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부터 3대째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을 세습한 것이다.

그러나 국군포로 1세대들은 늘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도 그 이야기로 희망을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학교 가서는 세뇌교육 받지만 아빠는 집에 오면 남한 교육을 했어요." 이 씨는 말했다.

"아빠 대에 통일이 못 되고 너희 대에 통일이 되면 너희는 꼭 남조선에 가야 된다. 그리고 통일이 안 되더라도 너희 남매 중에 누구라도 살아서 아버지 고향으로 가야 된다. 계속 이런 교육을 했어요."

"아빠가 자꾸 또 말하는 게 뭐냐면, 이제 조국이 통일이 돼서 너희가 남조선에 가면 아버지 훈장이 있다고. 아버지 훈장이 있으니까 너네는 영웅의 자식들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조국 통일이 되면 남조선 사람들이 달려나와서 너네를 목마를 태워서 꽃다발을 안겨주고 아버지 훈장을 달아줄 것이라고 이렇게 계속 교육했어요."

그러나 희망은 더 큰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출신성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탄광에서 일해야 했던 이 씨의 남동생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평소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 그리고 술자리에 있던 일행 중 하나가 이를 신고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남동생을) 데리고 가버렸잖아요. 그 공산당 새끼들은 데려갈 때 밤에 데려가요. 밤에 차 갖고 와서 쥐도 새도 누구도 모르게, 옆집도 모르게 실어가요."

몇 달 후 이씨의 아버지도 잡혀갔다. 나중에는 이 씨도 잡혀갔다. 이 씨는 이틀 후 아오지 공설 운동장 옆의 자갈밭으로 끌려왔다.

"나무 다리 밑에 거기에 나를 앉히더라고요. 앉히고 한참 있다 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기 시작하더라고요. 한참 있다 보니… 차가 쓱 오더니 글쎄 사람 둘이 내리는 거에요. 그게 바로 우리 남동생하고 아빠에요."

이 씨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그렇게 공개처형을 당했다. 그들의 이름은 이재암과 이강철. 최근 유엔 인권기구에 보내진 진정서에도 그 이름들이 실렸다.

6·25국군포로가족회는 지난 21일 인권조사기록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을 통해 유엔 산하 강제·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과 처형·노예·고문 문제 특별보고관들에게 북한에 억류됐다가 숨지거나 실종된 국군 포로와 그 가족에 관한 진정서를 처음으로 제출했다.

'괴뢰군'의 자식 꼬리표.. 결혼도 파탄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인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도 국군포로였던 아버지 때문에 진학에 좌절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 손동식 씨는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 포로로 잡힌 후 각종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폐암으로 더는 탄광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벌목 작업에 동원됐다. 그리고 1984년 1월 21일, 가족의 품에 돌아온 지 열흘 만에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 고 손동식 씨는 2015년 7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출처뉴스1

'괴뢰군'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북한에서의 결혼 생활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다. 인민군 장교였다가 이유도 모른 채 전역하게 됐던 남편이 나중에 손 씨의 성분이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된 후 집을 나간 것이다.

출신성분으로 받아온 차별에 더해 나중에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자 손 씨는 2005년 말 탈북을 감행했다. 무사히 한국에 정착하게 됐지만 자신의 유해를 고향인 경남 김해에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을 수가 없었다.

캐리어 3개에 나눠 담은 아버지의 유해

손 씨는 여러 시도 끝에 2013년 9월 아버지의 유해를 한국에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손 씨의 오빠와 막내동생이 아버지의 무덤을 파 유해를 두만강 너머 중국 브로커에게 넘겼다. 손 씨는 직접 중국에 가서 아버지의 유해를 인수했다.

한국 정부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아 손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캐리어 세 개에 나눠 담고 중국 세관을 통과해야 했다.

"사람의 유해가 작은 거 같아도 엄청 많더라고요. 사람이 세 명이 움직였는데 (몸통 유해를 담은) 두 사람의 캐리어는 통과됐고. 제가 마지막, 아버지 머리를 제 캐리어에다가 넣었어요."

하지만 그는 또다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손 씨의 오빠와 동생이 이로 인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진 것이다.

"아버지 유해는 한국에 오게 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정치범 수용소에 넣는 것과 바꿨어요,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가적 책무를 다 못했다 하면서 나한테다가 사과 한 마디 해주고… 자기들이 미안해서라도 손동식에게 훈장이라도 주는 게 예우지 않겠습니까…."

유해를 한국에 모셔오는 데 성공한 손 씨는 DNA 감정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부녀관계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갈등의 연속이었다. 정부는 관련법이 없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유해 송환 비용의 지급도 거부했다. 살아서 조국에 돌아온 국군포로는 받을 수 있는 보상금도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에게는 지급될 수가 없었다.

손씨는 이후 2년 가까이 투쟁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안고 청와대와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도 벌였다.

손명화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출처뉴스1

국방부가 유해 송환 비용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손동식 씨의 유해는 마침내 2015년 7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그러나 여전히 국방부 기록에 손동식 씨는 한국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국방부는 1998년 4월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있던 국군포로들을 일괄적으로 전사 처리했다. 이에 따라 당시 한국에 있던 국군포로 가족들은 국가유공자 지위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북한에서 태어난 국군포로의 자녀들이다. 한국 내 기록으로는 아버지의 사망 후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국가유공자 지위는커녕 아버지의 딸로도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화가 나요." 최 씨는 말했다. "어떻게 너희가 나를 아버지의 딸로 인정을 안해주냐. 내 아버지가 아파할 때 너희는 안 아파했잖아. 몰랐잖아. 근데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봤죠. 아버지가 아파하는 그 아픔의 배를 더 아파했어요."

최 씨는 2012년 탈북했다. 그 역시 가족들이 모두 북한에 있어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이 공개되는 걸 원치 않았다.

"(저번에 누군가가) 어떻게 가족 다 두고 (한국) 왔냐고 (묻더군요). 아버지가 한평생 이곳을 오고 싶어했기 때문에… 내 아들 딸 남편까지 포기하면서 내 평생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가 못 돌아왔던 그곳으로 오고 싶어 왔다고."

"그러면 다른 건 못해줘도 나를 그 아버지의 딸이라고… 왜 아버지의 삶 전체를 부정해버리나…"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국군포로 자녀들은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에 특히 분개한다.

"국군 포로 자식으로 딸로 살아내느라고 수고했다고 와서 잔등이라도 한번 쓸어주면 덧나나요." 최 씨는 말했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탈북민만 보면… 온 대한민국이 어쩔 줄 모르는데, 북한에서 자기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 불쌍한 병사의 딸은 들여다도 안본다는…." 이때부터 최 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 여기 군인들 보면 말해요. 너희 군대 절대 가지마라고… 전쟁 일어나면, 포로되면, 우리 아버지처럼 또 아오지 탄광 간다고. 너희 젊은 사람들은 도망치라고, 전쟁나면."

최 씨는 최근 다시 논란이 된 위안부 문제에 빗대 이렇게 덧붙였다.

"종군위안부 문제요, 나라가 없을 때 가장 연약한 여인들이 겪은 문제에요… 그 상처에는 지금 다치면 피고름이 나오고, 나라가 있으면서 북한 땅에 가서 이 나라 젊은이들(국군포로)이 당한 그 상처에는 지금도 다치면 선지피가 콸콸 쏟아진다고."

무관심의 이유

국군포로 문제는 위안부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부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이영환 대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최 씨의 아버지처럼 미국이 정전협상을 주도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국군의 전시 양민학살 등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진보 계열에서 국군 문제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김대중 정부 이후 사실상 모든 대통령들이 임기 내 이벤트성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미송환 국군포로 같은 까다로운 문제를 의제에서 피하려는 경향 등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80명가량인데 대부분 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탈북했다

출처뉴스1

국군포로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의 안이한 대응이 물의를 빚은 사건이 많아 정부가 홍보를 꺼린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이 대표는 덧붙였다.

1998년에는 자력으로 탈북한 국군포로 장무환 씨가 주중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2006년 방송을 통해 다시 공개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당시 외교부는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2004년에는 사망한 국군포로 이규만 씨의 딸이 아버지의 유해를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모셔 오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일도 있었다. 손명화 회장은 당시 한국 대사관에서 제대로 협조를 해주지 않아 결국 유해가 북송됐다고 말한다.

이 씨의 딸은 중국 공안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하반신 유골을 따로 숨겨둬 유해 전부가 북송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나 유해의 상반신은 북한에 남고, 하반신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극이 벌어졌다.

6·25국군포로가족회가 유엔에 보낸 진정서에 포함된 한만택 씨의 사례도 그렇다. 국군포로로 북한에서 살고 있던 한 씨는 2004년 72세의 나이로 한국의 친척과 연락돼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한국 국방부는 한 씨의 친척들이 보낸 진정서를 통해 한 씨의 탈북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적절한 협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한 씨가 공안에 체포됐음을 통보받은 후에서야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이후 한 씨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고 200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법원은 정부의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실질적 성과 위해선 정부가 나서야

손명화 회장을 비롯한 국군포로 가족들은 이번 유엔 진정서가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모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선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다른 나라는 국민이 억류되면 만사 제쳐놓고 구출에 나서는데…."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법률분석관은 BBC 코리아에 말했다.

유엔 결의안 같은 사안은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국군포로 문제의 실질적인 성과는 북한과 당장 교섭해야만 나올 수 있다고 신 분석관은 덧붙였다.

6·25국군포로가족회는 최근 국군포로에 대한 다큐멘터리 '버려진 영웅들 43호'를 제작했다. 손명화 회장은 앞으로 국제기구나 한국전쟁 참전국 16개국을 다니면서 국군포로의 삶이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을 제외한 최 씨와 이 씨는 아직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 때문에 익명으로 남길 원해 기사에 익명을 실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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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News |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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