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컴퓨터로만 하는 게 아니다? 주사위로 즐기는 TRPG의 매력

조회수 2020. 7. 10. 08: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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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의 매력

대한민국은 2000년대부터 시작한 PC방 사업의 영향으로 컴퓨터가 어떤 선진국보다도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컴퓨터로 게임을 즐기는 유저층 또한 두텁다. 이와 반대로 물 건너 섬나라 일본이나 게임 최대 시장인 북미의 경우 거치형 게임기를 통해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서 즐기는 게임들이 좀 더 강세를 보인다. 이제는 기계를 통한 게임이 대세가 되었지만, 기계를 통해서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번화가 여기저기를 둘러봤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보드 게임 카페들이 이를 말한다. 물론 대부분의 게임이 4인 파티를 완성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소위 ‘인싸 문화’에 속한다. 그래도 보드게임은 보드게임만의 재미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찾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PVP 또는 RVR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릴 적 즐겨 하던 게임 도둑잡기의 경우 경찰이 도둑을 잡는다는 진영대립의 형태를 띠고 있고, 모노폴리와 부루마블 또한 상대를 파산시키며 자신의 독점을 완성하는 서바이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피아 게임에서 모티브를 따온 ‘BANG’의 경우 팀전이란 탈을 뒤집어쓴 개인전에 가깝다. 경쟁이 기본 모토이기 때문에 게임 자체의 콘셉트는 맥락뿐인 경우도 많다. 그럼 결국 치밀한 팀플레이나 모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는 탐험심 충만한 플레이는 기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걸까? 정답은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장대한 모험을 떠날 수 있다. TRPG가 그 길을 열어줄 것이다.


TRPG가 뭐지?

▲TRPG에는 여러 소도구가 사용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주사위이다. 정성이 넘친다면 직접 맵과 오브젝트를 준비할 수도 있지만, 주사위만으로도 플레이할 수 있다

TRPG는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Table-talk Role Playing Game)의 약자로 테이블에 둘러앉아 하는 역할 수행 게임이다. 우리가 전사, 성직자, 마법사 등등 직업의 역할을 나누어 플레이하는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의 게임이 RPG라고 정의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TRPG의 주요 진행 수단은 대화이다. 대화를 통해 캐릭터의 행동을 정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공격력이나 행동에 대한 성공을 판정하는 데 주사위 같은 소도구가 사용된다.

▲TRPG를 플레이하기 위해선 룰북을 들고 게임을 진행할 게임마스터가 필요하다

TRPG는 게임을 진행하는 인공지능이 없는 대신 참여하는 사람 중 한 명이 게임마스터(이하 GM)가 되어 게임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GM은 직접 캐릭터를 키워내진 않지만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 캐릭터(이하 PC)의 행동에 따라 판정을 주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이상한 액체가 가득 찬 화병에 꽃이 꽂혀 있을 때, 플레이어 한 명이 ‘자신의 PC는 원예에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꽃의 상태를 확인하여 물이 안전한지 알아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하자. 이때 해당 플레이어의 말을 존중하여 원예학 판정을 할지, ‘아니요 꽃은 시들어 있습니다’라며 대놓고 경고를 할지, 또는 ‘꽃은 누가 봐도 싱싱해 보입니다’라고 판정 자체를 어렵게 만들지는 GM의 재량이다.

▲유명한 밈이자 캐릭터 작법 가이드 중 하나인 9개의 성향표의 기원은 TRPG이다

마스터가 아닌, 게임에 플레이어로 참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해당 게임의 룰에 맞춘 플레이어 캐릭터 시트를 작성해야 한다. 이 시트에는 힘, 민첩, 지능 같은 기본적인 플레이어 스텟부터 시작해 게임 룰에 맞춰 여러 가지 스킬들이 기재된다. 또한 TRPG는 GM이라는 또 다른 플레이어가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콘솔이나 컴퓨터로 하는 게임보다 더 섬세한 캐릭터 세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PC의 성격에 따라 같은 세팅을 가진 시나리오라고 해도 다양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TRPG의 장점이다. 캐릭터의 성격을 나누는 대표적 기준인 ‘성향표’의 기원이 아주 유서 깊은 TRPG 룰 ‘던전 앤 드래곤’에서 출발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검을 들고 용을 잡으러 갈 것인가, 도시의 괴현상을 탐사할 것인가?

▲엄청난 자유도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공부해야 할 룰북의 개수도 천문학적인 겁스

TRPG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룰을 플레이할 것이냐’이다. 룰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인 게임에서 유저들이 ‘장르’를 선택한다면 TRPG에선 ‘룰’을 선택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GURPS(겁스) 같이 일반적인 중세~근세 판타지부터 시작해 사이버 펑크, SF, 동양 무술까지 대응하는 범용 룰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응하는 방향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게임을 진행하는 마스터가 게임을 하기 위해 공부해야 할 범위가 넓어지며 그에 따라 플레이어의 시트 제작 난이도도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D&D가 없었다면 스카이림도, WoW도,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수많은 판타지 세계관의 RPG게임도 없었을 수 있다

TRPG에서 가장 유명한 시나리오는 역시 던전 앤 드래곤, 일명 D&D다. 매우 큰 인기를 얻었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에서 주인공 꼬마친구들이 플레이하던 게임이 바로 D&D이다. D&D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판타지 RPG의 조상님 격 되는 룰이다. 리니지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D&D라는 이름 아래 같은 조상을 둔 먼 친척 사이가 되어버린다. D&D 시리즈는 2014년에 발매된 ‘Dungeon & Dragon 5th’를 마지막으로 다음 판본이 발매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장 사랑받고 있는 판타지 TRPG이다.

▲국내에서 가장 쉽게 사용되는 TRPG 룰 크툴루의 부름. 방탈출 정도의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TRPG 룰은 ‘크툴루의 부름 RPG’, 일명 CoC다. CoC는 미국의 유명한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소설 ‘크툴루의 부름’에서 이름을 따온, 그의 세계관 ‘크툴루 신화’를 기반으로 한 TRPG 룰이다. 국내에서는 2016년 TRPG 전문 회사 초여명이 텀블벅에서 한국 발매를 위한 펀딩을 진행했고 목표 금액이었던 15,000,000원을 1378% 이상 초과 달성하는, TRPG 클라우드 펀딩과 텀블벅 펀딩의 역사로 남았다. 크툴루의 부름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조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광기에 잠식되며 발버둥 치는 PC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포계열의 TRPG이다. 가장 유명한 무료 공개 시나리오 ‘독스프’의 플레이 타임이 오프라인으론 1시간, 온라인으로도 길어 봤자 2-3시간의 가벼운 사이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고 편한 룰로 취급되고 있다.

▲이말년의 유투브, 침착맨 채널에서 플레이 되었던 CoC시나리오 호질

크툴루의 부름이 국내에서 대중화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반은 일반적인 룰에 비해 GM의 난이도가 쉬운 편이며 뼈와 살, 피가 난무하는 넥슨 클래식 RPG와 리니지의 정서에 이미 익숙해진 게이머층에게 어필하기 쉬운 룰의 분위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초여명이 창작 시나리오에 대한 제한을 크게 풀어준 덕분에 시나리오를 통해 소소하지만 창작에 대한 수익을 어느 정도 챙겨갈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었다. 덕분에 국내 크툴루의 부름 시나리오는 취향에 따라 골라 플레이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스타일과 다양한 난이도, 퀄리티를 보유하게 되었다. 작년 웹툰작가 이말년과 주호민이 유튜브를 통해 함께 플레이한 CoC 시나리오 ‘호질’이 국내 팬 라이터가 집필한 시나리오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상상력의 세계, TRPG월드로 어서 오세요!

이제 디지털 게임은 진짜 사진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때로는 진짜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구현해내는 경지에 다다랐다. 게임 시스템은 더 정교한 캐릭터의 조작감을 구현해 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매년 발전하는 디지털 게임의 기술력은 유저들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가상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상상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보는 건 어떨까? TRPG의 세계는 GM의 가호 아래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캐릭터가 심심풀이로 세상을 구할 수도 있고 자신보다 세상이 중요한 캐릭터가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 맘에 드는 룰을 고르고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선택해 친구들과 플레이해보자. 누가 GM을 맡느냐를 두고 시작부터 싸우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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