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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창구인가 범죄자 소굴인가, 두 얼굴의 텔레그램

텔레그램N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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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 국가보다 성범죄율과 여성 살해 비율이 높다는 대한민국에서 또 하나의 충격적인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들은 지난해 2월부터 수십여 명의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찍게 했고, 해당 영상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서 판매했다. 그 비밀 대화방은 'N번방' 혹은 '박사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곳에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N번방 사건 공조 수사 청원

지난해 9월, 대학생 취재단 추적단 불꽃은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최초로 보도했다. 당시 추적단 불꽃의 보도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같은 해 11월 한겨레가 관련 내용을 단독 보도하고, 그 내용이 트위터를 통해 공유되면서 텔레그램 N번방과 박사방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N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 수사를 요청하는 게시글이 국민 2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서 화제가 되었다.

▲가해자들은 아주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러왔다

N번방이라는 이름은 1번방부터 8번방까지 각기 다른 이름이 붙은 8개의 비밀 대화방에서 방마다 서로 다른 피해 여성들의 신상정보와 성 착취물이 올라온 데에서 비롯된 것이고, 박사방이라는 명칭은 비밀 대화방을 운영하던 가해자의 닉네임 '박사'에서 따온 것이다. 그동안 N번방과 박사방의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성 착취 영상물을 비밀 대화방에 올리고, 이들의 신상정보를 모두 공개해 피해자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협박했으며, 금품을 받고 피해자들의 영상을 판매해왔다. 그것도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문화상품권이나 가상화폐처럼 추적이 어려운 금품을 받고, 제3자에게 비밀 대화방으로 향하는 링크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아주 은밀하고, 지능적으로 말이다. 이들은 신고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비밀 대화방을 수시로 없애고 다시 개설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정확한 이용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비밀 대화방에 입장한 이들은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26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26만이라는 숫자는 텔레그램 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문에서 N번방 및 유사방 60여 개의 참여자 수를 단순 합산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비밀 대화방에 중복 참여했을 가능성이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들었을 가능성, 여러 사람이 하나의 계정을 공유했을 가능성 등을 모두 감안하면 실제 이용자 수는 이보다 적을 수도,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경찰에 체포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사진: SBS 뉴스)

현재 N번방 사건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박사방을 운영하던 조주빈은 지난 3월 16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포토라인에 세워달라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이것은 5일 만에 221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역대 청와대 국민청원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의 동의를 얻은 청원이 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두고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라며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


텔레그램이 악용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텔레그램의 본래 취지는 '검열 받지 않을 자유'였다

N번방 사건으로 텔레그램이 대중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텔레그램이 악용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텔레그램은 '검열 받지 않을 자유'를 목적으로, 러시아의 SNS인 브콘탁테(VKontakte)의 창립자 파벨 두로프와 니콜라이 두로프가 푸틴 정권의 검열을 피해 지난 2013년 독일에서 만든 것이다. 당시 두로프 형제는 러시아 총선과 대선 이후 반(反)푸틴 시위 참여자에 대한 러시아연방보안국(FSB)의 개인정보 요청에 반발해 망명한 상태였고, 메시지 암호화와 대화 삭제 등의 보안 기능을 내세운 텔레그램을 제작해 사용자를 모았다.

▲종단간 암호화 기능을 사용해 보안이 우수하다

그동안 텔레그램은 모든 대화를 비밀에 부치는 종단간 암호화 기능을 사용해 보안이 우수한 앱으로 주목받아왔다. 종단간 암호화 기능이란 A라는 사용자가 B라는 사용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A가 보낸 메시지가 암호화되어 서버를 거치고 B에게 도달되면 복호화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때 서버는 암호화된 메시지가 지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메시지를 볼 수가 없다. 심지어 발신자가 수신자 기기에 남은 메시지를 삭제하는 것도 가능해 제3자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있는 메시지를 언제든 삭제할 수도 있다. 그 보안이 어찌나 철통같은지 지난 2014년 텔레그램이 상금 30만 달러(약 3억 원)를 걸고 텔레그램 암호 체계를 해독하는 해킹 콘테스트를 열었을 때,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카카오톡 사찰 논란이 일었을 때, 텔레그램은 새로운 망명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N번방 사건 이전에 텔레그램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2014년 카카오톡 사찰 논란이 점화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집시법 위반으로 현행범으로 체포된 노동당 부대표가 수사 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자 경찰이 검찰을 통해 전기통신법에 의거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는데, 검찰이 카카오톡 측에 노동당 부대표의 지난 한 달 간의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요구해 제공받아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민간인 사찰 논란이 대두되었고, 카카오톡을 비롯한 국산 메신저를 이용한 이들은 텔레그램으로 갈아타는 '사이버 망명'을 택했다.

▲홍콩 시위에도 사용되었다

사이버 망명을 택한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었다. 이란에서는 2017년 이란 전역으로 퍼진 반정부 시위의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데에 텔레그램을 사용했고, 홍콩에서는 2019년 13만 명이 넘는 홍콩 시민이 하나의 채팅방에서 시위의 방향성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정보를 공유해 화제가 되었다. 텔레그램의 철통같은 보안이 때로는 독재정부의 억압을 피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커

▲테러를 모의하거나 가상화폐 해킹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보안성은 범죄자들을 끌어모으기에도 충분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IS가 테러를 모의하는 창구로 텔레그램을 이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국 정부는 테러 위협을 막기 위해 텔레그램에 관련자들의 신상을 요구했으나, 개인의 사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텔레그램의 주장을 꺾지 못했다. 여기에 북한 해킹조직으로 알려진 라자루스(Lazarus)가 텔레그램을 이용해 가상화폐를 해킹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이버 보안업체 카스퍼스키에 따르면, 라자루스는 텔레그램에 가짜 가상화폐 거래회사 계정을 만들어 고객을 유인한 다음 이들의 컴퓨터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심어 암호화폐를 빼돌렸다. 카스퍼스키는 영국, 폴란드, 러시아, 중국 등에서 피해자가 속출했다고 전했지만, 정확한 피해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진: 트위터 @nthroomboycott)

텔레그램을 이용한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로프 형제는 "개인의 사생활 권리가 더 중요하다"라며 관련 사용자들의 신상공개를 거절하고 있다. 이에 국내에서는 N번방 사건 직후, 텔레그램이 경찰 수사에 협조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텔레그램에서 발생한 성 착취 범죄의 문제점을 전 세계에 알리는 온라인 운동으로, 지난 3월 25일과 29일 오후 9시에 텔레그램을 동시에 탈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누리꾼들은 텔레그램에 N번방 사건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사진: 트위터 @nthroomboycott)

누리꾼들은 텔레그램 탈퇴 이유에 "Nthroom-We need your cooperation(N번방-텔레그램의 협조가 필요하다)"이라고 적어 텔레그램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 착취 사건의 실체를 알렸고, 각종 SNS에 '#nthroom_stop', '#nthroomcase' 등의 해시태그와 N번방 사건을 정리한 카드뉴스 등을 공유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로 번역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알렸고, CNN이나 뉴욕타임스 등 해외 유력 언론사에 N번방 사건을 제보하기도 했다. 경찰도 N번방 사건 수사를 위해 텔레그램 접촉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연 텔레그램이 이번에는 수사에 협조를 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과연 텔레그램이 문제일까?

▲텔레그램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보안성이 범죄자를 끌어들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텔레그램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 영상물을 유포하던 이용자들이 텔레그램을 떠나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음성 채팅 프로그램 디스코드에서 성 착취 영상물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즉 같은 플랫폼이라 할지라도 이용자의 인식에 따라 소통의 창구가 될 수도, 범죄자의 소굴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피해자의 인권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우선시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고 텔레그램이 N번방 사건을 좌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의 사생활 보호를 강조하며 수사에 비협조적인 텔레그램과 달리, 디스코드는 문제가 발견될 경우 서버를 즉시 차단하고, 한국 수사기관과 적극 공조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식을 가진 사용자가 플랫폼을 통해 제3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려놓았는데도 가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범죄 사건을 모르쇠한다는 것은 사용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두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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