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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모금, 영화 한 편

조회수 2020. 6. 21.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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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부르는 영화와 영화를 당기는 술이 있다. 둘의 작용은 기묘한 마법에서 비롯한다.  


페리에주에 벨에포크 로제와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루이 브뉘엘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스페인 영화를 다시 세상 밖으로 소환했다. 그의 영화는 늘 눈이 시큼할 정도로 현란한 색감과 정신없이 몰아치는 갈등이 지배했고, 때론 좀 심하게 헐떡거렸다. 어느덧 노년을 맞은 그는 자신을 투영한 것 같은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는 듯 보인다. 페리에주에 벨에포크 로제에 물든 오묘한 핑크빛과 지나치게 달지 않은 대신 은은하게 퍼지는 꽃향기는 그의 영화와 닮았다. 처음엔 모란 향이 퍼지고 바로 장미 향이 이어지더니 몇 초 후 딸기 향마저 치고 든다. 샴페인은 무조건 첫 잔보다 끝을 향해 갈수록 진하게 무르익는다.  


더 글렌리벳 12년 엑설런스와 <콜드 워>
장면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라면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콜드 워>는 1940년대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15년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막상 그토록 바라던 둘만 존재하게 된 순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건 왜일까. 어쩌면 그 사랑은 서로를 명분 삼아 자신을 버티게 한 냉전 같은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늘 달고 쓰다. 더 글렌리벳 12년 엑설런스는 더 글렌리벳 라인업 중 가장 부드럽고 달콤하다. 그토록 화사한 내음과 부드러운 바닐라 향은 순식간에 입안에 퍼졌다가 이내 여분의 잔향조차 남기지 않고 사그라든다.  


벨루가 보드카와 <언컷 젬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주위를 돌아보니 제자리인 경우가 있다. <언컷 젬스>의 욕망은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불쾌하고, 난생처음 느끼는 짜증과 피로로 가득하다. 러시아에서 온 벨루가 보드카와 <언컷 젬스>는 과격한 강펀치를 날린다는 점이 닮았다. 단순히 코를 마비시키는 알코올 향이 올라오는 대신 알싸한 후추의 풍미가 코끝을 친다. 그러곤 상큼한 여운을 선사한다. 희석하거나 냉동실에 꽝꽝 얼리는 건 좀 어리석은 짓이다. 상온의 스트레이트 샷을 단숨에 넘기는 순간 느껴지는 풍미가 진짜다.  


패트론 실버와 <결혼 이야기>
이제 막 이혼을 한 부부가 있다. 영화는 갑자기 LA와 뉴욕에 사는 남자와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소 생뚱맞은 연출 방식은 이별을 완료한 이들이 상처와 슬픔에서 영감을 얻는 부류의 예술가임을 상기시킨다. <결혼 이야기>의 엔딩은 기묘하리만큼 희망적이다. 이혼은 결코 비극이 아니다. 어쩌면 이혼은 결혼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패트론 실버는 멕시코산 아가베를 100% 사용해 만드는 수제 테킬라다. 뾰족하거나 모난 구석이 없지만, 테킬라 특유의 모래 냄새인지, 석유 같은 화학성 물질의 향이 맨 먼저 들어온다. 중반까지 힘있게 뻗어나가더니 견과류의 고소함과 코코넛의 달콤함이 사이좋게 보조를 이룬다. 그냥 마셔도 좋고 레몬과 소금을 갖추면 흥미진진하다.
  

버드 와이저와 <미드 90>
귀여운 포스터만 보고 달콤, 시원한 코카콜라를 상상하면 큰코다친다. 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는 1990년대 중반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13살 소년 스티비의 성장을 다룬다. 자신을 어린 애로만 보는 엄마와 폭력을 일삼는 형 사이에서 스티비는 자유롭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거리의 소년들을 동경한다. 소년은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자기만의 리듬과 방식으로 스스로 성장한다. 1990년대 미국 하위문화와 동부 힙합, 서부 힙합을 망라하는 빵빵한 사운드가 쏜살처럼 흐를 때, 빨간색 라벨이 빛을 발하는 버드 와이저에 손이 가는 건 정답으로 향하는 법칙이다.  


No.3 진과 <파이어 윌 컴>
어느 날 작은 산골 마을에 큰 산불이 일어난다. 푸른 숲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는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의 불씨가 번진다. 교도소에서 막 나온 방화범 아마도르의 일상을 쫓는 영화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는 마지막을 향해 전진한다. 다 타버린 앙상한 숲에는 인간의 나약한 욕망과 이중성만이 선명하다. 거대한 숲과 인간을 비추는 롱테이크를 바라볼 때 생각난 술은 풀 냄새가 폴폴 나는 진이다. 300년의 역사를 품은 No.3 진은 여러 겹의 풍미를 간직한다. 상쾌한 솔잎과 오렌지, 라벤더 맛이 지나고 나면 스파이시한 흙 냄새가 확 퍼진다. 초여름 낮의 진토닉만큼 신선한 술이 또 없다.  


화요 53과 <벌새>
강남구 대치동의 25.7평 아파트에서 10대를 보낸 김은희의 1994년은 철저히 무력하다. 은희의 바람은 크지 않다. 만화책에서 본 것처럼, 진실은 중요하고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며, 너는 언젠가 온전한 네가 될 거라는 미더운 말 한마디면 족하다. 그러나 삶은 소녀를 농락하는 것만 같다. 가장 찬란한 시절이라고만 하는데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 바라는 날이 이어진다. 은희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신다. 와인도, 사케도, 위스키도 아닌 알코올 도수 53도에 이르는 하드코어 증류주 화요 53을 맹물 마시듯 담담하게 비워낸다. 은희는 이제 더 이상 진지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구스 IPA와 <너는 여기에 없었다>
조너선 에임즈의 짧은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는 원작 소설에 충실한 듯하더니,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길을 선택한다. 살아 있음에, 또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옅은 유머가 소설에는 없고 영화에는 있다. 환상이 현실을 잠식할 때, 죽음이 삶을 잡아먹으려 들 때 우리를 구원하는 건 그토록 작고 사소한 손길인지도 모른다. 미국 시카고를 흐르는 시카고 강이 두 줄기로 갈라지는 곳에 ‘구스아일랜드’라는 이름의 작은 섬이 있다. 귀여운 거위가 그려진 구스 IPA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생각보다 더 깊고 씁쓸한데 그 담담한 태도는 어느 음식, 어느 자리에든 능청맞게 잘 어울린다. 영화 속 남자는 자주 강물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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