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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 그림'의 정체는?

아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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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예술의 중심지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떠난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를 통해 탕기 영감을 만나게 되면서 오랫동안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 사이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3점 그렸는데요. 작품을 함께 살펴볼까요?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92x75cm, 로댕 미술관

출처위키피디아

밀짚모자를 쓴 탕기 영감이 두 손을 맞잡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앉아 있습니다. 그는 진지한 표정과 생각에 빠진 것 같은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탕기 영감 뒤로 일본 판화가 여럿 걸려 있습니다.

‘탕기 영감의 초상’은 일본에 대한 그의 환상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반 고흐가 일본을 동경하게 된 것은 당시 수많은 유럽 미술가들을 들뜨게 했던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에 매료되면서부터였습니다. ‘둥둥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중적인 목판화입니다. 그렇다면 우키요에는 어떻게 유럽 화가들에게 주목을 받게 됐을까요?

두리번

일본은 17세기 이래 쇄국정책을 고수했고,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제한적으로 교역을 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일본의 문물이 조금씩 유럽에 소개됐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의 도자기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 소재 자체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 1854년 도쿠가와 바쿠후는 매튜 페리(Matthew Perry, 1794-1858) 제독이 인솔한 미국 함대에 굴복해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2백 년이 넘도록 쇄국정책을 취하던 일본이 개항하면서 유입된 일본의 공예품과 의복 등은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일본 미술품의 조형 원리, 미의식과 세계관에까지 관심사를 확장시켜 그것을 서구의 예술 언어 속에 흡수합니다.

에두아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8, 146x114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출처위키피디아

단순하면서 장식적이고,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우키요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 기법과는 판이하게 달라, 파리의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특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 고흐도 크게 보면 당시 유행했던 일본 취향, 즉 자포니즘(Japonisme)의 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빈센트 반 고흐, 오이란, 캔버스에 유채, 1887, 100.7x60.7cm, 반 고흐 미술관

출처위키피디아

그런데 고흐의 일본 취미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반 고흐의 고국 네덜란드는 일본이 유일하게 교역했던 유럽 국가이며, 네덜란드인들은 일찍이 우키요에를 비롯한 일본 미술품을 수입했습니다. 파리로 향하기 전에도 반 고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일본 미술품을 볼 수 있었고, 안트베르펜에 살던 시절부터 우키요에를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려진 그림에는 우키요에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번쩍

1886년 파리로 향하면서 반 고흐는 마치 우키요에를 처음 본 것처럼 열광했습니다. 한마디로, 반 고흐는 프랑스와 파리의 문화적인 투망에 걸린 우키요에에 반응했던 셈입니다.

네덜란드 시기까지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던 반 고흐는 파리로 나와 갑작스레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키요에와 인상주의 미술 중에 그가 어떤 양식에 더 영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일본 선승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8, 62x52cm,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

출처위키피디아

스스로를 선승(禪僧)처럼 묘사한 ‘일본 선승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은 일본이라는 이상향에 대한 감정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반 고흐는 일본의 선승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아집을 버리고 종교적인 사명에 투신하는 이상적인 존재를 그려본 것이죠. 

이 시절의 반 고흐에게 좋은 것, 훌륭한 것은 죄다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상적인 것을 가리킬 말이 필요했기에 ‘일본’이라는 말을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반 고흐가 예술가들의 공동체에 대해 품었던 희망은 1888년 12월, 그가 고갱과 다툰 끝에 스스로 귀를 자른 사건이 벌어지면서 물거품이 됐습니다.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혼자 남은 빈센트는 일본이라는 이상향도 사라졌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반 고흐는 점차 일본을 언급하지 않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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