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로 친부와 계모를 살해하다? '리지 보든'

조회수 2020. 5. 15. 17: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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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대체 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892년 8월 미국 매사추세츠, 한 부부가 자신의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됐습니다. 남편 앤드루 보든은 도끼로 13차례, 아내 에비 보든은 18차례 공격당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다름 아닌 둘째 딸 리지 보든. 그러나 리지 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진범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으로 남았죠.

폴 리버의 보든 가족

보든 가족의 집

보든 가족은 매사추세츠 폴 리버에 살았습니다. 앤드루 보든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9살 터울인 두 자매, 엠마와 리지를 낳았죠. 아내가 죽고 3년 뒤, 앤드루는 두 번째 아내 에비와 재혼했습니다. 집에는 네 가족 외에 브리짓 설리반이라는 하녀도 함께 살았으며, 자매의 외삼촌인 존 모스가 자주 왕래했습니다.

앤드루 보든은 부유한 사업가였지만, 지나치게 구두쇠인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일부러 폴 리버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번화가 대신 낙후된 동네에 거주했을 정도죠. 


사건 당시 엠마는 41세, 리지는 32세였는데, 두 사람 다 미혼이었습니다. 자매와 부모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딸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대학 진학은커녕 의식주조차 궁상을 떠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죠. 앤드루가 아내 에비의 가족에게 집을 선물하자 갈등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비가 돈을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했던 딸들은 새어머니가 더욱 꼴보기 싫었습니다.

수상한 징조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보든 가 주변에선 크고 작은 수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사건 전년 봄에는 보든 부부의 부재중에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고요. 살인 사건 몇 달 전에는 집 주변에서 수상한 남자들이 목격됐습니다. 리지는 이들이 며칠에 걸쳐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집안을 살펴봤다고 했죠.  

사건 며칠 전에는 온 가족이 심한 식중독에 걸려 크게 고생했습니다. 주변인들은 구두쇠인 앤드루가 남은 양고기를 며칠씩 다시 요리해 먹은 것이 원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에비는 누군가 독을 탄 게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사건 당일

리지 보든

1892년 8월 4일은 기록적으로 더운 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보든 부부는 자매의 외삼촌인 존 모스와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이후 존 모스는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나갔죠. 곧 앤드루도 시내에 나갔고, 에비는 하녀 브리짓에게 창문을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엠마는 페어헤븐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2주간 집을 비운 상태였어요.

아침 10시 반쯤 앤드루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앤드루는 거실 소파에서 낮잠을 잤고, 브리짓은 집안일을 계속했습니다. 브리짓이 창문을 다 닦고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리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어! 누군가 아버지를 죽였어. 가서 의사 보엔 박사님을 모셔와!

곧 경찰들이 집에 도착했고, 이웃집의 처칠 부인과 앨리스 러셀도 걱정이 돼서 찾아왔습니다. 보엔 박사는 앤드루의 시체를 확인한 후 페어헤븐에 있는 엠마에게 전보를 보냈어요. 그때 리지가 보든 부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야 사람들은 에비에게 아직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알리지 못했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브리짓과 처칠 부인이 2층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에비 보든 역시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기 때문이죠. 

검사 결과, 에비는 남편보다 2시간 먼저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사건의 가장 큰 미스터리죠. 집에는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범인이 어떻게든 흔적 없이 집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2층에서 에비를 살해한 후 2시간 동안이나 브리짓과 리지에게 들키지 않고 집안에 숨어 있다가 거실로 내려와서 앤드루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집안을 잘 아는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가장 먼저 존 모스가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그에게는 친척 집을 방문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브리짓도 오전 내내 창문을 닦았다는 일관된 진술을 했죠. 엠마는 페어헤븐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됐습니다. 결국 리지 보든이 친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리지의 재판

알리바이가 뚜렷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리지의 행적은 의문스러운 데가 많았고 진술도 일관되지 않았습니다. 리지는 앤드루가 거실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자신은 20분간 헛간에 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헛간에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 만큼 무더운 날씨였어요. 

또한 리지는 오전에 에비가 한 소년에게서 아픈 친구의 병문안을 와 달라는 쪽지를 전달받고 외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도, 아픈 친구라는 사람도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집안 어디에서도 그런 쪽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근처 약국의 약사는 “리지가 며칠 전 청산을 사려고 했지만, 의사의 처방이 없어 거절당했다”는 진술을 했습니다. 리지는 모피의 얼룩을 지우는 데 쓰려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경찰은 리지가 도끼 살인 전에 독살을 시도한 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리지 보든의 재판 과정을 묘사한 당시 신문 삽화

리지의 재판은 이듬해인 1893년 6월 열렸습니다.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사건인 만큼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고, 리지의 변호인단은 최고의 변호사들로 구성됐죠.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물적 증거가 있느냐’였습니다. 여러 정황은 리지가 범인이라고 가리키는 듯했지만, 정작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죠. 경찰은 정확한 살인 무기조차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집안에서 최근에 물로 씻은 것으로 보이는 도끼를 발견하긴 했지만, 당시의 수사력으로는 혈흔이 남았는지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이웃인 앨리스 러셀의 증언도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건이 있던 주에 리지가 드레스를 태우려고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리지가 엠마에게 “드레스에 페인트가 묻어서 태워버리려 한다”고 말하는 걸 봤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것이 증거 인멸 시도라고 의심했지만, 앨리스는 실제로 드레스를 태우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독실한 젊은 여성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당대의 편견도 한몫을 했습니다. 리지는 실제로 그전까지 교회에서 봉사하는 등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의견에 힘을 실어줬죠. 판결 결과는?

무죄

세기의 살인마인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리지가 무죄로 풀려난 뒤, 보든 자매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고 폴 리버의 부자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리지는 ‘리즈베스’로 개명했지만, 이웃들은 여전히 살인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자매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1905년 엠마는 리지와 말다툼을 벌인 후에 집을 나왔고, 죽을 때까지 동생을 다시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리지는 1927년 6월 1일, 66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던 엠마 역시 9일 뒤 동생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죠. 

그러나 100년이 지나도록 리지 보든은 여전히 뜨거운 관심의 중심에 있습니다. 독실한 젊은 여성이 친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살인 사건 용의자가 됐지만 무죄 판결을 받고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는 사실은 수많은 후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리지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발레, 오페라 등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미국에서 리지의 위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심지어는 아이들이 줄넘기를 할 때 부르는 동요에까지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리지 보든 도끼를 들어
엄마를 40번 내리쳤다네
자신이 한 짓을 보고는
아빠도 41번 내리쳤다네

리지를 주인공으로 한 후대의 창작물들은 대부분 리지 보든이 살인범이었다고 가정합니다. 물적 증거가 없었을 뿐 리지 외엔 범인일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은 ‘누가 죽였는가’ 대신 ‘왜 죽였는가’에 집중합니다.

그중 가장 흔한 가설은 ‘앤드루가 리지를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앤드루는 리지가 키우던 비둘기들을 도끼로 내리쳐 죽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앤드루가 리지를 육체적, 성적으로 학대했고, 참다못한 리지가 똑같은 도끼로 아버지에게 복수한 것이 아니냐고 추정한 거죠.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리지>(2018) 스틸

소설가 에드 맥베인은 자신의 소설 <리지>(1984)에서 ‘리지 레즈비언 설’을 제기했습니다. 리지가 하녀 브리짓과 연인이었는데, 둘의 관계를 새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들키자 그들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클로이 세비니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 영화 <리지>(2018) 역시 이 가설을 따르죠. 이 영화는 진지하고 건조한 톤으로, 리지 보든 사건에 여성 인권 문제를 엮어낸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20년 5월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리지>는 이 두 가설을 모두 채택했습니다. 다만 뮤지컬에선 하녀 브리짓이 아닌 이웃 앨리스가 리지의 연인으로 등장하죠. 극 중 리지는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합니다. 리지의 유일한 안식처는 자신이 키우는 비둘기와 옆집에 사는 앨리스뿐. 그러나 앨리스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가 비둘기들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자, 리지는 폭발하고 맙니다.

출처: 쇼노트
뮤지컬 <리지> 공연 사진

뮤지컬 <리지>는 ‘누가 죽였나’ 또는 ‘왜 죽였나’에 집중한 추리물이나 스릴러와는 거리가 멉니다. 대신 록 콘서트의 형식을 빌려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데 집중하죠. 유리아, 나하나, 김려원, 홍서영, 최수진, 제이민, 이영미, 최현선 등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했습니다. 남성 2인극이 대세를 이루는 대학로에서 드물게 등장한 여성 4인극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뮤지컬 <리지>

2020.04.02 ~ 2020.06.21
서울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관람시간 130분 (중간 휴식 15분)
만 15세 이상 관람가

유리아, 나하나, 김려원, 홍서영, 최수진, 제이민, 이영미, 최현선 출연

참고ㅣ<리지> 에드윈 H. 포터, 정탄 옮김,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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