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충실하고, 경계를 위반하는 '이상한 여자들'

조회수 2019. 8. 16.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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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랑
한국 역사 100년의 흐름 속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그려져 왔을까요? 지난 역사 속 영화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 중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하고, 경계를 위반하며, 사회의 위선과 억압에 저항한 여성들을 조명해봅니다.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여성캐릭터로보는 한국영화 100년 展


2019.07.12 ~ 2019.10.13

남성 중심으로 성장한 영화 산업 시스템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시선에 국한돼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항 여성 캐릭터는 왜곡된 여성의 재현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했죠. 그나마 주체적이거나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어김없이 '나쁜 여자'가 돼 처단의 대상이 되거나 '이상한 여자'로 낙인찍혔습니다. 나쁜 여자도, 이상한 여자도 아니라면 남성의 조력 없이는 무언가 해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지기 마련이었죠.

출처: 전시 포스터 | 한국영화박물관

철저하게 남성 중심이었던 영화 산업은 1990년대 들어오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 중심의 서사는 일종의 모험처럼 여겨집니다. 최근 10년 간 극장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의 영화는 10%를 넘지 못했고,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20%대에 그치고 있죠. 

출처: 전시전경 | 한국영화박물관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여성 캐릭터들은 사회가 주입한 젠더 규정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여성에게 드리워진 금기의 장막을 걷어내기도 합니다. 전시 속 영화 인물을 통해 그간 한국 영화가 그린 여성의 삶의 모습의 한계와 이를 깨기 위해 어떤 변화를 도모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성 '성'

먼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로 인해 단되되는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악녀' '팜므파탈' 등으로 불린 '불온한 섹슈얼리티'들은 권력이나 자기애적 정체성을 쟁취하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이용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이 남성의 권력이나 공동체의 윤리에 도전할 때 그들은 응징당하고 맙니다. ‘불온한 섹슈얼리티는 비극적 결말을 자초한다’는 다소 억압적인 메시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성 영화를 연구해온 평론가 여선정은 이를 자신의 섹슈얼리티로부터 권력을 쥐게 된 최초의 여성들이 전하는 무용담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출처: 영화 <운명의 손>(1954, 한형모)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카바레 마담으로 분해 북한 공작원 역할을 하는 마거릿(윤인자 역). 섹슈얼리티를 이용해 권력을 잡고자 시도한 과거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결국 응징당하고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 여성 퀴어 캐릭터의 역사도 꽤 깁니다. 다만, 1960~80년대 영화에서 동성애는 서사적으로 남성 폭력의 트라우마나 이성애 대체재로 설명되곤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정신병원에 갇혀 자살하거나 냉혹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남성을 처형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기도 했죠. 
출처: <아가씨>(2016, 박찬욱) 스틸 이미지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은 더 이상 여성 동성애를 남성 폭력의 트라우마나 범죄로 묘사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여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 등장해 남성 없는 세계에서 여성들의 관계와 서사를 집중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죠. 그 욕망과 일탈이 학교 밖을 넘지 못한다거나 단발적인 움직임에 그치고 만다는 한계가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개봉한 작품들은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에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모든 험담과 음모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레즈비언의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쁜 여자가 된 이유

여성이 그 어떤 억압에도 지지 않을 힘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 인물들은 그들을 가두던 경계를 박차고 나갑니다.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왜 그 힘을 써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서 펼치는 이들의 액션은 더없이 통쾌하게 느껴집니다. 

출처: <악녀>(2017, 정병길)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나쁜 여자'는 종종 남성의 지배를 거부한, 남성이 길들이기 힘든 여성을 지칭합니다. 이런 나쁜 여자 캐릭터는 1970년대 이후 범죄 영화가 다수 등장하면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무법의 세계에서 나쁜 여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죠. 특히 2000년대 이후 액션 영화에서 나타난 나쁜 여자들은 지배와 낙인이 아닌 스스로 악녀 되기를 감행했습니다. 

출처: <걸캅스>(2019, 정다원)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엄마라는 이름의 굴레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을 속박하던 대표적인 굴레는 '엄마' 아닐까요. 최근 한 국내 영화 잡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중 "모성은 본능이다/교육이다"라는 질문에서 88%의 사람들이 교육이라는 대답을 택했습니다. (프리즘오브 12호 '케빈에 대하여' 편) 많은 여성이 관습에 따라 모성애를 강요당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사회는 이상적인 어머니를 예찬하는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의 많은 엄마를 나쁜 어머니로 낙인찍곤 했죠. 아이들의 죽음 혹은 그들이 짓는 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스크린 속 엄마들은 직접 칼과 총을 들거나 문제를 은폐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추앙해온 모성 신화가 단숨에 위험으로 변환될 수 있음을 주지시킨 것이죠.

출처: <마더>(2009, 봉준호)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최근 들어서는 이런 엄마들 사이, 혹은 엄마와 딸 사이 이해와 연대의 폭을 형성하는 영화들도 등장했는데요.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서사로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출처: 미디어아트 존 전시 전경 | 사진제공 한국영상박물관
저는 여성에게 특혜를 요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좀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인권운동가 사라 그림케.

여성에게 씌워진 특정 이미지에서만 벗어나도, 여성 캐릭터는 훨씬 많은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가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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