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달라져야 한다면

조회수 2020. 5. 31.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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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셰프

얼마 전, 나를 꼭 닮은 아이를 낳았다. 삶에서 한 생명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것은 뭐랄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의 시작. 그러니까 이 작고 연약한 존재의 삶, 그 시작부터 온전히 나에게 오는 것이었다. 한 아이가 나에게 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깊고 묘한 감정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누구보다 '나'를 위하는 삶을 살아왔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방황하며 고민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 세상이 나에게 안겨주는 사회적 신화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온전히 나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 속에서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작고 연약한 존재가 나에게 찾아온 순간부터, 나는 나름대로 세워두었던 명확한 삶의 기준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 나와 동등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동반자가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작은 존재가 아프지 않게 깨지지 않게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행복한 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동시에 슬픈,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 


그런 하루 속, 참 맛있는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만났다. 언제나 그렇듯 늘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말해준다. 그동안 만나본 적 없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 <아메리칸 셰프>는 새롭게 내 삶의 한 켠을 자리잡은 '아이'와 '나'와의 관계 속 어떤 밸런스를 맞춰나갈 것인지에 대해 말해준다. 


"방해 안 할게."

"아빠 일해야 해."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셰프, 칼 캐스퍼는 늘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칼 캐스퍼 역시 아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메뉴 개발이, 오늘 찾아오는 유명 블로거에게 보여줄 새로운 요리가 더 중요하다.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칼 캐스퍼. 하지만 그의 삶은 언제가부터 삐걱대시 시작했다. 그는 인정받은 셰프이지만 메뉴 결정권은 레스토랑 오너에게 빼앗겨버렸고 그런 상황을 자신의 온전한 실력으로 극복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오히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는 스스로 찾은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유명 블로거의 혹평을 참지 못한 그는 불 같은 성격 탓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쩌면 자신의 성공했다고 믿었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아예 길을 잃은 기분이야. 늘 다음이 있었는데 이대로 끝나니까. 앞이 막막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앞이 막막해.”

"출발점으로 좋잖아요."


하지만 그 변화는 어쩌면 언젠가부터 삐걱대기 시작한 삶을 위한 새로운 기회였으리라.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 칼 캐스퍼는 자신이 처음 꿈을 꾸었던 마이애미에서 작고 소박한 푸드트럭으로 다시 요리를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요리를,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그리고 푸드트럭을 오픈하기 전, 무거운 짐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무료로 샌드위치를 나눠주는 중 탄 샌드위치를 아무렇지 않게 제공하려던 아들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이 일을 사랑해. 내 인생에서 좋은 일들은 다 이 일 덕분에 생겼어. 내가 뭐든지 잘하는 건 아냐. 난 완벽하지도 않아. 최고의 남편도 아니고 미안하지만 최고의 아빠도 아니었어. 하지만 이건 잘해. 그래서 이걸 너와 나누고 싶고 내가 깨달은 걸 가르치고 싶어.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나도 거기서 힘을 얻어. 너도 해보면 빠지게 될 거야.”

칼 캐스퍼의 일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자신의 아들에게 진지하게 전하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 언젠가 나도 저런 장면을 만들어내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하루하루 아슬아슬한 마음을 안고 살아갈 만큼 크게 사랑하는 존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지켜 나가면서 나에게 온 이 연약한 존재를 함께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맞이하고 우리가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방법.


또 이 영화는 말한다. 만약 살아가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 하나를 의미한다는 것.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할 때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저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무릎을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가면 된다. 그 앞에 어떤 삶이 펼쳐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걸어가다보면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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