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불만으로 가득해.. <블러드심플>

조회수 2020. 5. 15. 15: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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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심플

두 남녀가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다. 차 안에는 빛 한점이 없다. 가끔씩 반대편 도로에서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들의 차 안을 잠깐 비췄다가 사라진다. 그때마다 우리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지나치듯 볼 수 있다. 


점멸하는 빛, 그 안을 감도는 불안한 기운, 그리고 알 수 없는 긴장감 같은 것들. 그들은 사랑에 빠진 연인인가?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 불만이 있고, 운전을 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 여자의 남편인 자신의 상사에게 불만이 있다는 점이다. 동일한 남자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두 남녀는 결국 그날 모텔에서 함께 잠든다.

코엔 형제의 눈부신 데뷔작인 이 영화에는 놀랍게도 이후에 코엔 형제가 보여줄 그 모든 것들의 기미가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 불륜에 빠진 두 남녀와 불륜의 피해자인 남편, 남편에게 고용된 사립탐정은 순간 순간 어떤 선택들을 하고 그 선택은 마치 정교하게 고안된 도미노처럼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종국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들을 몰고 간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선택을 추동하는 동력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스포가 될까봐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립탐정이 자신의 목표를 바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는 그런-자기 자신에게 특별히 더 이득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행동을 하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증명한단 말인가? 그 대답은 더 놀랍다. 사립탐정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에게 증명받고 싶어한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에서 사립탐정의 행위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나긴 하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그는 그냥 그들-아내와 자신의 직원-을 흘려보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저 그들이 마음껏 서로를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공통된 사람에 대한 미움을 사랑으로 착각한 그들은 서로를 열렬히 원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시들해지거나 서로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은 서로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리라. 


이 영화에는 남편과 아내가 찍은 사진이 두 장 나온다, 비교적 최근에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에서 여자의 표정은 한없이 울적해보인다. 하지만 더 예전에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에서 그 두 사람은 활짝 웃고 있다. 어쩌면 남편은 자신과 아내가 통과한 시간처럼 그들의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을 수도 있다. 

결국, 문제는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행에 빠졌을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고통의 시간에 빠져들고 있다고 느껴질 때, 이 세계가 나에게만 너무 가혹하게 굴고 있다고 느껴질 때(아, 이 느낌은 얼마나 싫은지!), 우리가 얼마만큼의 품격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는가, 이런 질문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때떄로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한다. 우리는 그게 하등 무의미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전전긍긍한다. 나에게 가장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을 명백하게 알면서도 나 자신(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을 고통으로 밀어넣을 때가 있다. 왜? 대체 왜? 


내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코엔 형제는 왜 〈블러드 심플>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만으로 가득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교황이든, 대통령이든, 올해의 인물이든 알게 뭐야. 뭐든 잘못될 수 있잖아. 난 불만을 가진 채로 살겠어. 이웃에게 도와달라고 해봤자, 모두 헛일이거든.”


그러므로 영화 처음에 깔리는 이 나레이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의 한심한 읊조림만은 아닐 것이다. 이 대사가 담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바꿀 길 없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고 있는 가장 비천한-그러나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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