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회수 2020. 5. 7. 11: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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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2017)

1.

영화 ⟨남한산성⟩의 원작은 소설 ⟨남한산성⟩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언젠가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만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소설가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답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김상헌과 최명길, 둘 중에서 어느 편이시오?”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닙니다.”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오.”

대화를 마친 작가는 돌아오는 길에 “타협할 수 없는 이념의 지향성과, 당면한 현실의 절벽 사이에 몸을 갈면서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내며 길을 열어간 그분의 생애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2.

영화는 병자호란이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조선 정치인들의 말을 담아낸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과 가까워질수록 말은 칼이 되어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고 살 길과 죽을 길을 임금의 눈앞에 펼쳐 놓는다. 


하지만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영화는 살 길과 죽을 길 중 어느 길이 더 중한지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먹먹하다.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의 처절한 말들을 잠시 옮겨보자.

최명길: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내일 신을 죽이시더라도 오늘 신의 문서는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 “명길이 칸을 황제 폐하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로 칭했으니 전하께서는 명길의 문서를 두 손에 받쳐들고 칸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최명길: “전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는 것과 같이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김상헌: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신은 차마 그런 임금은 받들 수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최명길: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서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3.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최명길과 김상헌 중 누구의 편을 들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갈등 구도가 형성된 듯하지만, 실제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이 싸움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전체 기득권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최명길의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었다. 


예컨대, 당시 조선시대 주류 지식인이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은 "최명길은 이익만 알고 의리를 잊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최명길은 지조를 지키지 못한 선비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최명길을 비판했던 기득권 집단 역시 최명길이 마련한 삶의 길을 통해 남한산성에서 살아 내려왔다는 점이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백성과 신하의 살 길을 만든 것은 바로 최명길 자신이었던 것이다. 

4.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 세 가지를 꼽았다. 여기서 열정이란 김상헌을 비롯한 조선 사대부들이 목숨만큼 중시했던 ‘대의’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베버는 이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시민들에 대한 책임감과 현실에 대한 객관성을 결여한 열정은 자아도취로 빠지기 쉽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5.

보통 대의는 피아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대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자는 강력한 열정을 갖는 지지집단을 얻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이런 대의를 진지하게 실현해나가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과거 적이라고 규정했던 세력들과 손을 잡아야 하거나 심지어 적의 다리 밑을 지나가야 할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치는 바로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지점에서, 최명길은 자기를 더럽히더라도 백성을 살리는 길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정한 정치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상보다 자신을 더 앞세우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여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이상 뒤에 숨어 현실을 부정해버리거나 이상을 버리고 현실 속에 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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