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 is 뭔들

조회수 2020. 4. 28. 11: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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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 (2014)
너는 잠재력이 많아.

처음 이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분깨나 좋았다. 외모나 능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소실되거나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닌, 그 자체로 계속 얻어지는 것. 내 안의 모든 잠재력이 만개하는 날을 상상했다. 위기 상황을 만나면 한 방에 찾을 수 있는 연금이 생긴 듯했다.


그런데 이 연금에는 조건항이 숨어 있다. 

물론 찾을 수 있지.
네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한다면.

이처럼 잠재력은 듣는 이의 동기를 고양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다. 특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선 이에게 더 효과적이다. "사실 당신의 무릎 관절은 마라톤의 전설 이봉주 선수의 것과 같습니다. 어서 일어나 한 걸음 더 뻗어보세요."


과연 잠재력이란 무엇일까? 믿고 기다려도 되는 녀석일까. 그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국어사전)

1.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에 숨어 있는 힘
2. 이미 가졌거나 앞으로 될 수 있는 것
3. 가능성
4. 개발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적 우수성 또는 재능

위의 정의로 봤을 때 잠재력이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선물은 아닌 듯하다. 고로 우리는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1개 이상의 영역에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났다. 이 글을 아직 읽을 줄 모르는 아이부터 헤아릴 수 있는 당신까지 동일하다.


어째 좀 찝찝한데? 보이지도 않는 크기를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다는 걸까. 나에게 많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없거나 적다는 걸 의미하는 건가. 개인마다 정해진 총량이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우사인 볼트의 잠재력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이세돌은 알파고의 코(가 있다면)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잠재력을 좀 더 끌어올려야 하나. 아니면 이들 모두 자신의 잠재력을 이미 다 소진한 걸까.

사람은 갓 태어난 순간부터 좋아하는 빛이나 잡음의 양 심지어 포옹 시간조차 다르다고 한다. 더욱이 각기 다른 능력과 성향들 중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잠재력을 찾아내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심지어 어렵사리 찾아낸 그것이 내가 가진 최고의 잠재력이라는 걸 확정하기도 어렵다. 


당장 알 수 없기 때문. 따라서 잠재력은 현재의 정답이 아닌 미래를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알고 보니 우사인 볼트는 바둑에 더 소질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볼 지점은 여기. 설령 특정 분야에 대한 누군가의 잠재력을 판별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장치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운 좋게도 당신이 수영에 굉장한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판명 났다. 그렇다면 당신에겐, 반드시 그것을 실제 삶으로 실현시켜야만 하는 책임이 있는 걸까.


답은 영화 〈4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등학생 준호는 수영을 좋아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들 하지만 대회에서는 늘 4등을 한다. 아들의 1등을 원하는 엄마(정애)는 새로운 수영코치(광수)를 찾아가고, 코치 역시 준호가 범상치 않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준호의 잠재력에 올인. 때론 충돌하고 때론 등수에 흥분하며 1등을 향해 달려간다.


잠시만.. 수영은 준호가 하잖아! 그렇다면 이 초딩에겐 어떤 시간들이었을까. 그의 일기장을 엿보기로 하자.


#1.

2015년 9월 5일. 날씨 맑음. 오늘 대회에 나갔다. 경기가 끝나면 엄마는 내 이름을 '4등'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화가 잔뜩 나셨다. 차라리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수영을 하라신다. 나는 수영이 재밌는데 왜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4등도 쉬운 건 아닌데.


#2.

2015년 9월 20일. 엄마가 새로운 코치님을 소개해줬다. 수영을 왜 하고 싶었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재밌어서 했지. ㅎㅎ 그런데 대답은 엄마가 하셨다. 코치님이 대회에서 몇 등하냐고 묻자, 엄마는 '재능은 있는 애'라고 답하셨다. 코치님이 엄마는 앞으로 수영장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3.

2015년 9월 25일. 물 밖으로 나오는데 코치님이 숏 핀으로 등을 때리셨다. 너무 아파서 물로 다시 들어갔다. 코치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장 나오라고 하셨다. 물에서 나가자 계속 때리셨다. 아프고 무서웠다. 그러고 나서 분식을 사주셨다. 미워서 때린 게 아니라고 하셨다. 구두쇠 아버지 얘길 해주셨다. 내가 수영을 잘하는 아이라고 하셨다. 핫도그가 맛있었다. 집에 오자 동생이 매 맞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 자식이 엄마에게 일러 버렸다. 그런데 엄마는 별 말이 없다.


#4.

2015년 9월 29일. 물속에 잠수하는 게 좋다. 그 안까지 들어온 햇빛이 좋다. 우주에서 온 에너지. 손에 담으면 기운이 솟는다. 그래서 수영이 좋다.

오늘은 코치님께서 빗자루를 잡으셨다. 한 대 한 대가 너무 아파서 엉덩이가 터지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하면 때릴 일도 없다고 하신다. 난 지금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5.

2015년 10월 15일. 대회에서 2등을 했다. 엄마는 '거의 1등'이라며 기뻐하셨다. 코치님은 뭘 잘했다고 웃냐며 혼을 내셨다. 그래도 집에 오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엄마도 좋아했고 아빠도 좋아했다.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6.

2015년 10월 16일. 코치님이 대걸레 자루를 들고 오셨다. 평소보다 기록이 2초가 부족해서 화가 나셨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코치님의 눈과 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수영복을 입은 채 도망쳤다. 집에 와서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엄마는 코치님보다 더 무섭게 화내며 때리셨다.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7.

2015년 11월 5일. 계속 수영 생각이 났다. 어젯밤에는 훈련하던 수영장에 몰래 들어갔다. 참았던 수영을 맘껏 하며 물속에 있었다. 진짜 좋았다. 오늘은 코치님을 다시 찾아가서 수영이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1등을 하고 싶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고 물어보셨다. 솔직히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1등을 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계속할 수 있다. 코치님은 술을 한잔 드시더니 말씀하셨다.


"내가 도사맹키로 점 한 번 쳐볼까? 니 혼자 해봐라. 그러면 금메달 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를 준비시키고,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준비시키고,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TED 역사상 가장 우수한 강연 중 하나로 꼽히는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do schools kill creativity)〉의 연사이자 교육가 켄 로빈슨(Sir Ken Robinson)의 말이다. 각 교육과정에서의 경험은 (다음 과정에서)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 가 보다, 그 자체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다.


잠재력의 이면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을 뱉는 모든 순간이 미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미래만 바라보는 건 의외로 중독성이 있다. 지금의 긍정적 요소를 되새기는 것보다 앞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기대하는 게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존재하고 있다. 이미 가진 것은 물론, 앞으로 얻게 될 잠재력 모두 '매 순간 맞이하는 지금' 갖고 있는 셈이다. 준호의 엄마는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수영을 좋아하는 초등학생 준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처럼, 미래의 정해진 순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준호는 그 덕에 좋아하는 수영을 포기해버렸다.


시간이 지나, 준호가 미래에 도달하여 자신의 일기장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그 시간들이 정당했다고 생각하게 될까. 그렇다면 슬픈 일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의 미래를 선점할 테니.


하지만 영화는 코치의 마지막 말인 "니 혼자 해봐라"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전하는 듯하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 그 과정에서 지속적인 만족감과 행복을 얻어야 한다는 것. 우리에게 이 심플하고 당연한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수영 덕후 준호는 모진 매질을 견뎌내고, 포기하고, 다시 코치를 찾아갔다.


*


당신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오늘의 당신은 어제의 잠재력에 대한 실현이 맞다. 그러나 모든 잠재력을 다 실현할 의무는 없다. 당신이 되어야 하는 최종적 존재에 대해 예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의 당신은 차마 이루지 못한 존재의 과정이 아니다. 지금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옳다.


1등만 기억한다고 우기는 세상 속에서, 당신은 오늘도 누군가를 그 자체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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