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 근무라 예민합니다

조회수 2020. 4. 20. 16:07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데몰리션

우당탕 쾅쾅...쿵쿵쿵...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보다 6층은 더 위에 있는 집에서 공사를 시작했다더니 생각보다 훨씬 큰 소음이었다. 바로 위나 아래 집에서 공사를 하는 것 마냥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띵동띵동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마스크를 쓴 사람이 잔뜩 화난 눈을 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코로나로 재택 근무 중이라 안 그래도 예민하거든요. 화상통화도 해야 하고 집에서 일하느라 힘든데 이렇게 시끄럽게 공사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우리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분이었는데 우리 집이 공사를 하는 줄 알고 찾아오신 거였다. 우리보다 6층은 더 위에서 공사를 하는 거라고, 우리 집이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을 했더니 직접 올라가서 공사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우리 집에 찾아왔다.


“죄송해요. 공사 소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오전엔 일하느라 집에 없다 보니 이렇게 소음이 심한 줄 몰랐네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안 그래도 재택근무하느라 유독 예민해요”


오전에 집을 비워서 잘 알 수 없었던 층간소음을 이렇게 코로나19로 새롭게 알게 됐다. 그리고 재택근무로 예민해진 이웃도. 


우당탕 쿵쿵 거리는 공사 소리가 계속 귀를 거슬리게 했지만 한편으로 시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모두가 서로를 피해 다니는 고요한 요즘, 적막을 깨뜨리는-간접적 시원함이랄까. 그렇게 좋게 생각하기엔 너무 시끄러워서 결국 집을 나와야 했지만...

영화 ⟨데몰리션⟩의 데이비스가 생각났다. 


그는 길을 가다 건물을 철거하는 공사장에 들어가서 자기가 대신 일을 하고 싶다고, 심지어 인부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건물을 부순다. 


그의 이런 이상행동은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부터 시작됐다. 아내가 죽기 전 고쳐달라고 했던 냉장고를 산산조각이 나도록 분해한 뒤부터-그는 예전과 달랐다. 아내가 죽었는데도 괜찮다고 바로 회사에 출근하고 이상하리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의 균열은 점점 티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야 돼”


그래서 그는 자기 집의 모든 것을 부수고 조각내기 시작했고 물건뿐 아니라 자기 삶까지 되돌아 보게 된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규칙적으로 회사를 오가던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 분해해보기 시작하면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슬픔이 마지막에서야 터지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짓누르는 데 익숙해서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주인공이 물건을 분해하고 부수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감정의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설정이 단순하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기가 살던 아주 말끔하고 비싼 집을 부수는 장면이 나올 때 마다 나도 살짝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너무나 정돈돼 있고 말끔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론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니컬한 태도 때문인 건지, 아님 정말 그냥 비싼 것을 부술 수 없으니까 저렇게 부수는 걸 보면서 간접적 쾌감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큰 슬픔과 절망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그나마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 무언가를 부술 때고, 그래서 그런 장면이 나올 때가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 저 사람이 저렇게라도 슬픔을 표현해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 


물론 아파트 공사는 너무 시끄럽고, 심지어 요즘엔 왜 이렇게 공사를 자주 하나 싶을 정도로 우리 아파트는 한 달 동안 세 집이 연달아 공사를 하고 있다. 처음엔 그래도 그 소리 덕에 누가 살고 있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긍정은 사라졌다. 재택 근무가 아니어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층간소음에 유독 귀가 예민해졌다. 


우당탕 쿵쾅거릴 때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집을 나서면서 잠깐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차라리 내가 저기 가서 깨부숴보고 싶다고.


봄이 왔지만 밖을 맘껏 돌아다닐 수 없는 요즘엔 마음속 깊이 찌꺼기가 쌓이는 느낌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고 맘껏 돌아다닐 때가 오면 층간소음에도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재택근무로 예민해진 이웃도 웃으며 인사하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