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시대의 사랑

조회수 2020. 4. 2. 15: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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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퀄스(2015)

밤의 여의도 버스 정류장. 나처럼 퇴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장인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이 한 명 있었는데 갑자기 그중 한명을 붙잡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봐요~ 지금 마스크도 안 썼어? 제정신이야?”


혀가 꼬부라져 발음이 뭉개졌지만 뜻은 분명하게 전달됐다. 그게 몇 달 전. 코로나19가 국내에 막 발병하기 시작할 때였다. 발병 초기였기 때문에 정류장에 절반은 마스크를 쓰고 절반은 쓰고 있지 않을 때였다. 다행히(?)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취객의 시비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취객은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바야흐로 이제는 마스크를 안 쓰면 취객이 아니어도 시비를 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대가 됐다. 


‘마스크 시대’가 되면서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줄어 들었을 뿐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도 읽기 힘들어졌다. 서로간의 감정교류가 전보다 현저히 줄어든 지금 떠오른 영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홀트가 나오는, 비주얼이 아름다운 ⟨이퀄스⟩

이 영화는 ‘인류 대전쟁’이후 지구는 폐허가 되고 남은 곳은 ‘반도국’과 ‘선진국’ 뿐이라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도국’은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결함 있는 인간들이 사는 폐허 같은 곳이고 ‘선진국’은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발달한 인간이 사는 편리한 도시다. 


‘선진국’에 사는 사일러스와 니아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유니폼 같이 생긴 흰 옷을 입고 멸균 공간처럼 보이는 최신 건물에서 거주하고 일을 한다. ‘감정’이 생산성을 저해하고 인류의 발전을 막는 질병이라고 보기 때문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린 사람으로 분류돼 결국엔 치료제를 먹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 


인간 교류와 접촉은 철저히 금지돼 있고 모두 집에서 혼자 블록쌓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밥도 절대 마주보고 먹지 않는다. 인류생산을 위해 정해진 시기에 의무임신을 하러 치료소에 들어가긴 하지만 그 외의 신체접촉은 없는 곳이다. 

감정이 사라진 이런 곳에서 사일러스와 미아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몰래 키우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고 ‘선진국’을 탈출해 ‘반도국’으로 넘어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안락함과 편리한 생활이 보장된 감정통제 사회보단 폐허일지언정 서로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선택을 한 둘. 과연 이 두 사람이 계획대로 ‘선진국’을 탈출해 사랑을 이룰 수 있을지... 감정이 통제된 근 미래라는 독특한 설정 속 아름다운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이 펼쳐지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감정을 드러내면 발각된다는 설정 때문에 둘은 눈빛과 미세한 표정만으로 서로를 향한 끌림을 나눈다. 마스크를 쓰진 않아서 얼굴 전체가 드러나긴 하지만 모두가 무표정한 사회이기 때문에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다. 순간 흔들리는 눈빛,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서로의 감정을 포착할 뿐.


요즘 같은 ‘마스크 시대’가 극단으로 간다면 영화 ⟨이퀄스⟩의 감정통제 사회와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비언어적 감정표현 방법이 오로지 눈빛 뿐 인 것도 그렇고, 서로간의 접촉 빈도를 줄이고 접촉 거리를 늘리다 보니 감정을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조금 좋았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 보니 내 표정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편하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다 부드럽고 친절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업무용 표정) 마스크를 쓰니까 그런 감정노동이 줄었다. 가끔 나는 그냥 무표정이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를 산 경우도 있어서 표정에 신경이 쓰였는데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선택이 살짝 아쉽기도 하다. 감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사람 사이의 불편함도 줄고 오해도 미움도 없어지는데 왜 굳이, 감정을 가진 인간이고 싶어 할까. 감정 없는 사회는 무료해 보이긴 해도 훨씬 편하고 합리적이고 안락해 보이는데. 갈등과 미움과 괴로움이란 감정까지 다 감수할 정도로 사랑이 정말 그토록 찬란한 것인가?


사랑이 그토록 찬란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이 자기 마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는 건 알겠다. 감정도 마스크를 써서 보이지 않을 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초기엔 조금 편했지만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표정이 너무 궁금해졌다. 


지금 이 ‘마스크 시대’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와중에도 사랑의 힘으로 예전과 같은 접촉을 할 순 있겠지만 진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남의 횟수를 줄이고 멀리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손자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손자가 보고 싶어도 보러가지 않고 참는 그런 어르신들을 주변에서 본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이 개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코로나19 덕에 처음으로 하게 됐다.

예전처럼 표정과 스킨십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들을 직접적인 말로 표현하는 수밖엔 없다. 좋은 걸 더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싱긋 하는 미소 혹은 곤란한 표정으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기가 힘들어진 이상 똑 부러진 감정 표현이 필요하게 됐다.


어설프게 서로의 표정으로 감정을 살피는 것보단 확실하고 거리두기가 편하긴 하지만 왠지 아쉽다. 말하지 못해도 얼굴에 드러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려고 노력을 했었단 사실을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알았다. 깔깔거리면서 서로의 팔을 치고 신이 나서 침 튀기며 얘기하던 일들이 얼마나 서로 대화에 몰입했던 것인지를 이제 알았다.


‘마스크 시대’가 지나가서 모두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이 다시 오면 그래도 한동안은 귀찮아도 영혼 없이 더 많이 웃어보고 싶다. 업무용 표정일지라도 그렇게 타인에게 친절해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지금 이 ‘마스크 시대’가 너무 답답해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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