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포기하기엔 멸망이 너무 멀기에

조회수 2020. 3. 23. 16: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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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즈&이어즈

지난 일주일간 외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집에만 있었다. 봄철 이 무렵이면 언제나 가벼운 감기를 앓고 지나갔지만,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쓰는 중엔 사소한 감기기운도 무심히 볼 수 없었다. 혹시라도 감기가 아니라 코로나19라면, 괜히 바깥 출입을 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병을 옮기는 건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감기일 것이라는 동네 의원의 말에도 일단은 집에 틀어박혀 매일 열을 재며 증상을 체크했다.


처음 며칠은 집 밖으로 안 나가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보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닷새쯤 지날 무렵엔 갑갑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바깥 세상의 소식들은 온통 암울하기만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박봉을 받으며 일하던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이 집단 감염됐고, 직업 특성상 하루에도 몇 장씩의 마스크가 필요한 간병노동자들은 마스크 지급 우선 순위에서 밀려 맨 얼굴로 일해야 했다. 마트 사재기가 사라진 대신 집에서 생필품을 주문하는 이들이 늘어난 탓에, 부쩍 늘어난 물량을 감당하지 못하던 택배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 

유럽에선 길거리의 아시아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백인들의 소식이 속속 들려왔고, 미국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국경을 닫았다. 손이야 깨끗하게 씻으면 된다지만, 스스로 ‘문명 세계’라고 불렀던 이들이 맨 얼굴을 드러냈다는 충격은 좀처럼 씻기지 않았다.


분노와 죄책감과 우울이 복잡하게 뒤섞인 마음으로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디스토피아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종의 적극적인 무책임이라고 할까. ‘어차피 다 망한다’고 생각해 버리면 역설적으로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고 노력하는 것도 희망이 있을 때나 감당하는 고통인 것이지, 아예 답이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내심 순응과 포기에서 오는 안도감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책임한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이, 하필이면 〈이어즈&이어즈〉였다. “2019년부터 2034년까지 15년간 세계가 순조롭게 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는 추천을 듣고 별 생각 없이 재생했던 나는, 여섯 시간 뒤 한층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숨을 돌려야 했다.

〈퀴어 애즈 포크〉를 집필하고 〈닥터 후〉 프랜차이즈를 부활시켰으며 스핀오프 시리즈 〈토치우드〉를 만든 천재 작가 러셀 T. 데이비스(이하 RTD)는 인류에 대한 애정과 낙관으로 가득한 작가다. 하지만 사랑이 크면 상처도 큰 법이다. RTD는 종종 그토록 사랑하는 인류가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 앞에 누구보다 더 냉정해진다.


다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정치인들의 비정함을 그렸던 〈토치우드〉 시즌3 ‘지구의 아이들’이 그랬고, 〈닥터 후〉 뉴시즌 4 ‘좌회전 하세요’가 그랬던 것처럼. RTD는 사회에 팽배한 불안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고 이민자들을 탄압하며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극우정치가 불러올 미래에 대해 발언하는데 주저가 없었다.


〈이어즈 & 이어즈〉는 이와 같은 RTD의 세계 전망이 가장 정점에 오른 작품이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고, 기업가 출신 정치 신인 비비안 룩(엠마 톰슨)이 포퓰리즘 발언들로 바닥 민심을 끌어 모으며 서서히 중앙정계로 발을 들이미는 근미래의 영국, 라이언즈 가족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남중국해 패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자, 세계 증시는 폭락하고 금융회사들이 하나 둘씩 파산한다. 안 그래도 자산관리와 회계가 점차 인공지능의 몫이 되는 통에 일자리를 위협 받던 스티븐(로리 키니어)과 셀레스트(트니아 밀러) 부부는, 은행이 파산한 탓에 전 재산을 날리고 바닥에서부터 새로 시작한다. 


난민 관리를 담당하는 지방의회 공무원인 라이언즈 가문의 셋째 대니얼(러셀 토비)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 빅토르(맥심 볼드리)와 사랑에 빠지는데, 빅토르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강제추방을 당하며 대니얼의 세계도 함께 무너진다.


바로 코 앞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탓에, 〈이어즈&이어즈〉은 종종 이게 드라마인지 뉴스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위력을 과시한다. 이 세계 속에서 북극은 이미 완전히 녹아 없어졌고, 바나나와 나비는 멸종했으며, 이상기후로 80일 동안 멈추지 않고 비가 내리는가 하면, 매년 해수면 상승으로 집을 잃는 이재민들이 속출한다. 

그러나 〈이어즈&이어즈〉가 정말로 섬뜩해지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 와중에도 인류가 반성하거나 멸망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꾸역꾸역 살아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실종되고, 우리가 알고 있던 동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멸종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새 사업을 시작하고 연애를 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바람을 피우고 주변 사람들을 흉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사악하지도, 그렇다고 숭고하지도 않은 찌질하고 평범한 삶이 계속되는 디스토피아인 셈이다.


적극적인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볼 작품을 찾던 나는 패닉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다 끝장이 나버린다면 편한 마음으로 끝을 맞이하겠지만, 고통은 있으나 끝은 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을 극복할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감정을 투자한 나는 별 수 없이 라이언즈 가족이 그 끔찍한 시대를 어떻게 버텨내고 극복하는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작품을 보던 내 뒤통수를,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목격한 라이언즈 가문의 할머니 뮤리엘(안나 리드)이 힘차게 후려쳤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앉아서 종일 남 탓을 해. 경제 탓을 하고 유럽 탓을 하고 야당 탓을 하고 날씨 탓을 하며 광대한 역사의 흐름을 탓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핑계를 대지. 우린 너무 무기력하고 작고 보잘것없다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 잘못이지. 왜 그런 줄 아니? 1파운드 티셔츠 때문이야. 우리는 모두 1파운드짜리 티셔츠를 보면 이렇게 생각해. ‘완전 거저네, 마음에 들어.’ 그리곤 사지. 가게 주인은 티셔츠 값으로 달랑 5펜스를 챙겨. 그래도 우리는 그게 괜찮다고 생각해. 값을 치르고 평생 그 시스템을 믿지.

난 모든 게 잘못되는 걸 봤다. 시작은 슈퍼마켓이었어. 계산대 여자들을 자동 계산대로 바꾼 게 시작이었지.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안 했잖아. 20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거리 시위는 했니? 항의서는 썼어? 다른 곳에서 장을 봤나?

안 했지. 씨근덕대기만 하고 참고 살았어. 인제 계산대 여자들은 다 사라졌다. 우리가 이 지경으로 놔둔 거야. 계산대 여자와 눈 마주칠 일 없지. 우리보다 적게 버는 여자 말이야. 인제 없어졌어. 우리가 없앴고 쫓아낸 거야. 참 잘했지.

그러니까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RTD는 인류에 대한 애정과 낙관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작가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창조한 고통 속에서 인물들이 끝까지 의지를 놓지 않고 발버둥치는 광경을 세필화로 묘사하고, 너무 늦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당장 내일의 뉴스 헤드라인으로 떠올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어즈&이어즈〉 속 선명한 디스토피아의 비전 앞에서 절망했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또 다른 내일을 꿈꿔야 한다는 RTD의 의지를 보며 희미한 희망을 얻었다.


인류가 코로나19를 현명하게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아직 장담하기는 어렵다. 중국과 한국은 천천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공공 의료가 허약한 국가들은 노골적으로 노인 환자들에겐 치료 자원 투입을 줄이겠다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외부인들에 대한 차별은 방역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내가 가벼운 감기기운에도 오랫동안 집 안에 머물렀던 것처럼, 인류도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단 코로나19 이후의 세계가 그 이전의 세계와는 얼마나 다를지를 염려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낼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RTD가 〈이어즈 & 이어즈〉를 통해 알려준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핑계를 댈 때마다 세상은 성큼성큼 어두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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