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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가장 보편적인 소녀.. 벌새

조회수 2019. 10. 18. 21: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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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2019)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좋은 것을 줄 수도 있고, 나쁜 것을 받을 수도 있다. <벌새>의 14살 은희(박지후) 역시 그렇다. 자식들을 차별하는 권위적인 아버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딸에게 무관심한 어머니, 폭력적인 오빠와 밖으로만 나도는 언니가 있는 집은 은희에게 불안을 준다. 집을 착각해 응답 없는 아래층에서 한참이나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 은희는 집이 그에게 안정을 주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교실이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다. 같은 반 친구들은 늘 책상에 엎드려 있는 은희를 푸대접 하고, 남자친구마저 미덥지 못하다. 마음을 나누는 하나 있는 친구, 장미꽃을 선물하는 엑스 동생 등 은희를 둘러싼 관계들은 어느 순간 쉽게 허물어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그 안에서 잠깐의 소속감과 일탈로 해방감을 얻지만 집으로 돌아와 작은 방에 혼자 몸을 누일 때면 은희는 더 작아 보인다.ᅠ

은희는 부모의 눈치를 살피고, 자신을 “개패듯 패는” 오빠를 당해내는 와중에 귀 뒤에 난 혹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오간다. 아무도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않는 삶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은희의 몸짓은 부지런히 날개 짓하는 벌새와 닮았다.ᅠ


그러나 1994년에는 중학생 소녀가 이해하기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의 무더위가 전국을 달궜고, 북한의 절대 권력자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리고 다리가 무너졌다.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두 동강 난 다리에서 이른 출근과 등교를 하던 시민 32명이 숨졌다. 전국민적인 상실은 은희에게도 상흔을 남긴다.


영지(김새벽)는 은희에게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것을 내어준 사람이다. 어느 날 한문 학원에 나타난 휴학생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좋아하는 것을 묻고, 함부로 말을 놓지도 않는다. 이따금씩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다였지만 은희에게 필요했을 말을 건넨다. 

늘 오빠에게 맞는 은희를 가족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영지는 “너 이제 맞지마. 누구라도 널 때리게 두지마. 맞서 싸워”라며 당부한다. 어쩌면 은희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남자친구의 찬사나 엑스동생의 고백이 아니라 영지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응원이었을지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불현듯 사라진 영지는ᅠ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주었다. 어른을 설명하는 수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영지가 은희에게 건넨 말과 차 한 잔, 불러준 노래는 제대로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어른만이 가능한 것이었다.ᅠ그리고 그것들이 은희에게 좋은 흔적을 남겼다는 걸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전혀 관심 없었던 같은 반 아이들을 살피는 은희의 얼굴에는 기대가 은근하게 떠오른다. 은희는 씩씩하게 감자전을 해치우고 참 아름답고 신기한 세상에서 언젠가 제 삶도 빛날지 모른다며 조심스럽게 바라고 있지 않을까?

“떡집 좀 그만 우려먹으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받을 정도로 은희에게는 김보라 감독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감독은 은희처럼 대치동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며, 부모님은 떡집을 운영했다. 귀 뒤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기도 했고, 한문 학원에서 만난 선생님은 영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영화적으로 각색됐지만 그래도 감정선은 중학생 때의 내 것이니 반반이라면 어떨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나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자기 것으로 끝나지만 이걸 공동의 기억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인 것 같다.”


오래 전에 끝난 중학교 2학년 시절의 감각을 흘려보내지 않고 갈무리 한 뒤 세심한 영화로 펼쳐낸 감독의 영화적 신념 덕분에 은희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소녀를 목격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를 자신이 지나온 그 때로 인도하는 은희를 당신도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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