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새로운 면면

조회수 2021. 3. 25.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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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의 사각거리는 감촉, 저만 그리운 거 아니죠? 디지털 기기가 만연한 요즘에도 꾸준히 연필을 찾는 문구 수집가들의 이야기.
출처: www.instagram.com

태어나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사용하는 도구, 연필. 시대를 막론하고 첫 걸음마를 떼듯 글을 배울 땐 모두 연필을 쥔다. ‘예술과 과학의 확산에 이것처럼 기여한 물건도 없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일상화되어 있고, 날마다 그 이름이 불리는 물건도 드물 것이다’라는 독일 연필 회사의 광고처럼 세상을 바꾸었지만 연필처럼 가장 보편적인 물건도 없다. 그럼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연필을 쥔 것이, 또 연필의 짝꿍 지우개를 사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에 밀려 연필과 펜, 지우개가 우리의 기억에서 흐릿해진 사이 전 세계적으로 문구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연필보다 엄지와 검지로 휴대폰을 확대하는 것이 더 익숙해졌고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확산되면서 학교 앞 문구점이 잇따라 문을 닫기 시작했다. 과연 아날로그 문구 시장은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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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수집가 캐롤라인 위버가 운영하는 뉴욕의 연필 가게 CW Pencils.

위축된 문구 시장

1938년 <뉴욕 타임스>에 ‘타자기가 손으로 쓰는 필기도구인 펜과 연필을 몰아낼 것’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100년 혹은 200년 후 도서관에서는 연필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한 문헌을 구하려 할 것이다’라는 부정적 결론을 내린다. 사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타자기를 넘어 각종 스마트 기기가 발명되었지만 여전히 연필은 살아 있다. 하지만 연필, 지우개 등의 국내 제조 공장은 중국으로 모두 넘어갔고 스마트 문구의 등장으로 생산량 또한 줄어들었다. 문구업계는 태블릿 PC나 모바일 제품에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 문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만 애플, 삼성 등 전자기기 브랜드에서 출시한 제품에 비해 제품력, 브랜드파워가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 2000년대부터 매년 1000여 개씩 전국의 문구점이 폐점하는 것도 현실이다. 1980년부터 서울 강동구에 자리 잡은 문구완구거리 역시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20%가량 가게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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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문구점 카키모리에서는 자신만의 잉크를 만들 수 있다. 2 연필 수집가 캐롤라인 위버가 운영하는 뉴욕의 연필 가게 CW Pencils. 3 CW Pencils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빈티지 연필부터 전문가용 연필까지 다양한 제품을 판매한다.

일상품에서 수집품으로

그렇다고 모두에게 아날로그 문구가 외면받는 건 아니다. 오래된 문방구를 찾아다니며 SNS에 그 모습을 기록하고 옛 문구를 수집하는 모임도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에 #고전문구를 검색해보면 기억에서 잊혀졌던 알록달록한 문구를 만나볼 수 있다. 성공한덕후, 호돌이문방구 등 고전 완구 수집 유튜버들은 30~40년도 더 된 문방구를 찾아다니며 티티파스, 지구색연필처럼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문구를 리뷰한다. 고전 문구를 사고파는 시장도 늘어나는 중이다. 100~300원이던 연필, 지우개는 지금 몇 천원, 몇 만원을 호가하며 그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변한 만큼 문구 브랜드도 변한다. 명품 문구 브랜드는 고급화 전략을 선택해 연필과 볼펜을 일상 용품이 아닌 취미, 소장 용품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1761년 독일에서 설립된 파버카스텔은 2001년 창립 240주년을 기념해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1250만원대의 에디션 ‘퍼펙트 펜슬’이 매진된 경험을 토대로 꾸준히 프리미엄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와 손잡고 만들었던 색연필, 크레용 세트 ‘칼박스’는 출시 당시 300만원을 호가했지만 완판을 기록한 데다가 현재는 빈티지 마니아들 사이에서 구하기 힘든 매물이 되었다. 파버카스텔의 CEO 롤프 시퍼런스 역시 한 인터뷰에서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이 늘면서 연필을 사는 건 확실히 줄었다. 이제는 연필을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이유에서 구입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프리미엄화, 감성화 전략으로 지난해 전 세계 필기구 시장은 200억 달러(약 22조7140억원)의 규모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로 학교, 회사에는 갈 수 없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연필을 수집하거나 취미로 컬러링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덩달아 연필을 중심으로 문구의 가치를 재조명한 책도 늘고 있다.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의 문경연 대표는 그간 문구를 수집하기 위해 떠난 여행을 정리한 책 <나의 문구 여행기>를 출간했고, 포토그래퍼이자 여행작가인 정윤희는 문구를 수집하고 관찰하며 깨달은 단상을 책 <문구는 옳다>로 펴냈다. 문구는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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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급 종이만을 취급하는 프랑스 파리의 문구점 멜로디스 그라피크. 2 카키모리에서는 잉크뿐만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종이, 노트도 구입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문구점

문구가 수집품으로 떠오르면서 더 이상 대량으로 판매하는 도매 문구점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국내의 경우 다이소 등 대형 생활용품 브랜드의 등장으로 많은 도소매 문구점이 문을 닫았다. 대신 디자인 문구라는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면서 연필, 종이, 도장 등 하나의 제품에 집중한 편집숍이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뉴욕 소호의 작은 연필 가게 CW Pencils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로 떠올랐다. 가게에는 오너인 캐롤라인 위버가 1920~50년대 만들어진 미국 빈티지 연필부터 포르투갈에서 구한 재스민 향기의 연필, IBM의 오래된 연필 등 어렵게 구한 컬렉션이 구비돼 있어 문구덕후에게 명성이 자자하다. 여행길이 막힌 지금 온라인 주문을 통해 CW Pencils의 연필을 국제 택배로 배송받는 사람도 많다. 파리의 문구점 멜로디스 그라피크는 종이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양피지, 핸드메이드 종이는 물론 페르시안 스타일의 노트와 레터프레스 엽서 등 클래식한 아이템으로 가득하다. 또 일본 도쿄의 문구점 카키모리는 문구덕후들 사이에서 원하는 색상과 배합으로 자신만의 잉크를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3가지 색상을 배합해 자신만의 채도와 명도를 지닌 잉크가 탄생한다. 국내에는 연필을 전문으로 한 문구점 흑심, 기록광을 위한 올라이트, 필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동백문구점 등이있다. 학교 앞 문구점은 사라질지 몰라도 영감과 리프레시를 위한 문구점은 늘어날 것이다. 전구가 발명된 이후에도 프래그런스, 인테리어 등의 키워드로 향초가 살아남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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