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이 넓은 집

조회수 2021. 2. 3.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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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 '풍년빌라'부터 카페, 사무실, 게스트 하우스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 '여인숙'까지. 건축 소장 임태병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집의 모습.

임태병(문도호제 소장)

하루의 끝, 현관문을 열면 드디어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신발을 신고 벗는 행위는 세상 안팎을 오가기 위한 준비운동과 같다. 설계부터 기획, 운영, 관리까지 확장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건축사 사무소 문도호제의 임태병 소장은 현관처럼 모호한 경계의 공간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적인 공간이지만 결코 프라이빗하지 않은 공간, 현관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2000년대 초반에 홍대에 저를 비롯한 친구 4명이 모여 카페 비하인드를 열었어요. 십수년간 만난 스태프, 파트타이머만 해도 50명은 될 거예요. 그중 몇몇 친구가 저희 집에서 하숙을 했죠. 그때 ‘가족’의 개념을 재정립했어요. 1년에 몇 번 만나기 힘든 부모님보다 매일 얼굴을 보며 식사를 같이하는 ‘식구’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거든요.”

1 임태병 소장을 비롯한 3 세대가 살고 있는 풍년빌라의 1층 다이닝. 2 풍년빌라의 서재 또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들과 가족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임태병 소장은 더 큰 집을 얻어 함께 살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2012년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한일 현대건축 교류전>에 참여했는데, 일본 건축가 나루세 이노쿠마를 통해 셰어하우스란 단어를 처음 접했다. “집은 되게 무거운 자산이에요. 큰돈이 드는데 수익도 안 나고 유동이 불가능해서 묵혀야 하죠.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전월세 보증금이 있더라도 꺼내서 사용할 수 없어요. 집을 소유하는 대신 점유하는 형태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쩌다 집’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협동조합의 이름으로 지방자치단체의 문을 두드렸는데 지속 가능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업체가 아니라면 지원이 불가능했다.

3 카페와 사무실, 게스트하우스, 주택이 어우러진 여인숙. 4 문을 닫아두면 각 세대만 열어두면 모든 구성원이 함께 사용할 수 있다. 5 혼자만의 시간, 공간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여인숙의 게스트하우스 여정.

“한국에서 주택이 공급되는 방식은 대형 건설사가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돈을 가진 동네 유지가 원룸, 다세대주택을 짓는 게 대부분이죠. 공간에 거주자의 생활 패턴이 전혀 담길 수 없어요. 또 땅과 건물이 패키지로 묶여 있어요. 땅값은 장기적으로 오르지만 건물은 감가상각 되니까, 이 둘은 묶여 제로섬이 돼요. 장기 점유를 통해 땅을 빌리고 건물을 지을지, 고칠지는 거주자가 결정하면 어떨까 고민하던 찰나 운이 좋게 저렴하게 땅을 빌리고 건물을 지어줄 건축주를 만났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응암동 ‘풍년빌라’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가 건축주로 나섰고, 임태병 소장의 가족을 비롯한 작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입주해 가족 공동체를 이뤘다. 세입자가 집주인을 구한 셈이다. ‘풍년빌라’는 여느 셰어하우스와는 다르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층별로 세대를 나누는 보편적인 방식 대신 각 세대가 더 많이 마주칠 수 있도록 복층 구조로 설계하고 각 층마다 현관을 중심으로 주방, 서재 등 다른 세대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 공간들을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카페, 라이브러리에 간 듯한 거리감과 집의 안락함 모두 가진 중간적 공간을 구현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현관의 확장이다. 덕분에 모든 세대는 집의 너비가 유동적으로 늘어나는 데다가 집에서 외부 미팅을 편안히 할 수 있다.

6 문도호제 옆 1인용 게스트하우스 여정은 주말에만 예약을 받는다.

김은희 작가는 ‘풍년빌라’ 근처에 건물을 하나 더 계획했다. 임태병 소장은 직접 설계에 참여해 카페와 사무실, 게스트하우스, 주택이 한데 어우러진 건물 ‘여인숙’을 완성했다. ‘여인숙’에는 문도호제의 설계사무소와 1인용 게스트하우스 여정이 있다. 두 공간은 주방을 공유함으로써 연결, 분리된다. 임태병 소장은 ‘풍년빌라’ ‘여인숙’을 통해 중간 주거의 개념을 싹틔워냈다. 베이비붐 세대의 새로운 주택을 지을 수 있는 경제력과 집, 주방, 카페 등을 필요로 하는 젊은 세대의 니즈를 연결하는 개념이다. “연희동에 종종 큰 단독주택이 매물로 나와요. 집에 방문해보면 자녀들을 출가시킨 중년, 노년의 세대주만이 살고 있죠. 자녀방은 창고로 쓰고 정원은 방치되어 있어요. 나이가 들면 집을 유지, 관리할 힘이 없으니까 적당한 규모의 아파트로 집을 옮기고 남는 비용을 노후자금으로 사용해요. 대부분 비슷한 루트죠. 이걸 조금만 바꾸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집에는 침실, 욕실처럼 내밀한 공간도 있지만 주방과 거실, 서재처럼 열린 공간이 있어요. 이 공간을 동네 주민들이 카페,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면 공간에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뿐더러 수익도 얻을 수 있어요. 꼭 돈이 아니어도 노동으로 공간의 가치를 교환할 수도 있을 테고요.”

이러한 개념을 구현한 공간이 ‘해방촌 해방구’다.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홀로 작업할 수 있는 서재를 겸한 세컨드하우스를 짓고자 한 건축주의 의도와 중간 주거의 개념이 어우러졌다. 10평 남짓한 땅에 주방, 서재, 거실, 침실로 구성된 4층 건물을 짓고 1층은 손님을 위한 주방 겸 다이닝으로 분리시켰다. 이곳 역시 신발을 신은 채 다닐 수 있도록 계획해 건축주의 개인 손님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에게까지 열린 공간으로 확장의 여지를 두었다. “동네에 전화기가 하나뿐이던 시절에는 동네 사람들이 전화기가 있는 집으로 왔어요. 기술적, 경제적으로 전화기가 무거웠기 때문이죠. 지금은 개통만 하면 해결돼요. 집도 부동산의 영역으로 무겁게 연결되니까 아파트, 다세대주택, 원룸 이외의 모델이 나오기 어려워요. 집이 가벼워지면 소유하지 않아도 될 테고 접근, 활용이 쉬워질 거예요. 그런 실험을 조금씩 해보는 게 제 몫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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