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적 취향

조회수 2021. 2. 2. 16: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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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주인공으로 떠오른 만화 캐릭터들! 고고한 명품 브랜드와 자유분방한 캐릭터의 이색 만남.

붙잡고 싶은 계절은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변하고, 온통 마음을 쏟아부었던 사랑도 하루아침에 시들고 마는데, 하물며 취향이라고 변함없이 올곧을 수 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로고가 큼직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옷장을 넘어 의자와 책장까지 점령한 로고 티셔츠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맹렬하게 지배했던 이런 취향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린 건 잘 재단된 고매한 옷도, 웅장하게 과장된 옷도, 호사스럽게 치장된 옷도 아니었다.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들이 주로 한여름의 소나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당황스럽게도 그건 ‘만화’와 ‘캐릭터’에 있었다. 시발점은 발렌시아가였다. 뎀나 바잘리아는 번쩍이는 소재의 코트와 날렵한 구두로 한껏 격식을 갖춘 차림에 헬로 키티를 장식한 분홍색 가방을 매치해 무대에 올렸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조화 스타일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우아한 차림을 하고서는 유아적 취향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태도라니. 차가운 긴장과 날 선 흥분이 감도는 고고한 패션 하우스에 등장한 어떤 규칙도 경계도 없는 자유분방한 태도야말로 지금의 하이패션이 취해야 할 가장 동시대적인 것처럼 다가왔고, 유치한 만화적 요소 역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단서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패션이 조금씩 만화 속 캐릭터를 차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창작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괴짜이자 로맨티시즘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지독한 탐미주의자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온갖 색과 소재, 장식이 충돌하는 구찌 하우스 곳곳에 미키 마우스를 능청스럽게 주입했다. 유난히 복잡하고 화려하며 유별난 옷으로 소문난 이 기묘한 하우스에 그저 미키 마우스의 해맑은 얼굴을 하나 첨가했을 뿐인데, 여느 하우스처럼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친근한 브랜드처럼 다가왔다.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는 미국 중산층을 노골적으로 폭로했던 심슨과의 협업을 통해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1980년대 MTV 문화를 경험하며 자란 세대에게까지 주저 없이 다가섰다. 마크 제이콥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류사회의 우아함과 하류사회의 천박함이라는 양극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는 상업적인 디자이너답게, 찰스 슐츠의 <피너츠> 속 캐릭터를 곳곳에 새겨 넣으며 동시대 하이패션에 어떤 익숙함과 친숙함이 필요한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이처럼 하이패션의 최전선에서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만화 속 캐릭터를 더했을 뿐인데, 한식이 간절했던 오랜 해외여행 끝에 마침내 동치미 한 사발을 들이켠 듯 속 시원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슈프림이나 팔라스, 에리즈와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들 또한 하위문화를 기반으로 한 특유의 냉소적이고 혐오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머프나 불독 같은 만화 속 캐릭터를 결합해 흥미로운 형태의 아이템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격식과 규율을 거스르며 스스로를 분방함 속으로 내던지던 그들 또한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던 만화적 정서에서 어떤 재미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유행을 알고 다들 비슷한 차림으로 다니는 시대에,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던 만화 속 캐릭터는 그 어느 것보다 근사하고 효용 있는 요소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만화 속 캐릭터는 특권의식을 지닌 듯 고고한 태도로 일관하던 콧대 높은 하이패션의 벽을 과감하게 무너트리고 있고, 동시에 하이패션 특유의 긴장을 날려주는 전천후 비밀 병기가 됐다. 게다가 황당한 것이 유행이 되고 그 유행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때, 패션 하우스의 정통성이 뒷받침되니 이 모든 것이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한 우스운 장치가 아니라 신박한 존재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인해 희망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요즘, 옷에 차용된 만화 속 캐릭터들이 그래도 낙관적인 미래가 있음을 전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계절을 풍성하게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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