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사피엔스의 탄생

조회수 2021. 2. 8. 16: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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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부캐'가 대세! 평범한 일상을 심폐소생하는 새로운 캐릭터의 시대.

1시간보다 조금 더 걸리는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인 8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고 또 1시간이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은 기필코 퇴근하고 글을 써야지!’ 출퇴근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침대에 털썩. 아침에 호기롭게 했던 다짐은 또 잊혀지고 만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한 달, 1년이 훌쩍 간다. 연말을 맞아 새로 산 다이어리에 목표를 적지만 그다음 해에도 실패. 그렇게 피로는 점점 쌓여만 가고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직장인 무기력증, 번아웃증후군은 이제 새삼스러운 단어도 아니다. 과연 안 겪어본 직장인이 있기나 한 걸까? 분명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해낸 것은 없는 기분이 든다면? 이렇게 평생 개미처럼 살다 인생을 끝마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면? 한때 내 안에 활활 타오르던 열정의 불씨가 꺼져가는 것 같아 공허한 기분이 든다면 당신에겐 부‘ 캐’가 필요하다. 온라인 게임에서 원래 사용하던 계정 이외에 새롭게 만든 캐릭터를 뜻하는 부캐는 본캐와 다른 플레이를 시키며 새로운 재미를 찾는다. 이미 엔딩을 본 게임이라면 일부러 본캐와 반대의 선택을 하며 부캐를 키워보기도 한다. 단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재미 때문에! 계정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는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도 부캐는 열일 중이다. 새로 생긴 장소에 가기 좋아하는 직장인 A는 자신이 방문한 핫 플레이스만 업로드하는 부계정을 따로 만들어 열심히 운영한다. 영화 마니아인 직장인 B는 인상 깊은 대사를 캡처해서 올리는 영화 전용 계정을 따로 등록했다. 부계정의 매력은 나를 팔로한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업로드할 수 있다는 점. 요가와 사랑에 빠져 피드에 요가 수련일지를 올리다 잦은 포스팅이 혹여 지인들에게 피로감을 줄까 걱정하던 친구는 최근 부계정을 만들어 요기니로서의 자아를 마음껏 발현하고 있다.

취미를 넘어 부캐로 제2의 직업을 찾거나 돈까지 버는 이들의 실화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언제나 전설처럼 회자된다. 회사를 다니며 패션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 평일엔 회사로 출근을 하고 주말엔 필라테스 강사로 변신하는 지인,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쓰다 에세이를 출간하고 주말에는 글쓰기 강의를 하는 친구의 친구…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부캐로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을 수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2020년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멀티 페르소나’를 꼽았다. 개인이 상황에 맞게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부캐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회사에서의 모습과 퇴근 후 자아, SNS상의 모습이 다른 건 MZ세대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로 우리는 우리 안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손쉽게 꺼내 보일 수 있게 됐다. 부캐 찾기 현상은 과거에도 늘 있어왔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요즘에는 생존을 위한 대안으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디지털 플랫폼의 혁신으로 고용 형태가 유연해져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의 시대에는 부캐를 기르는 것도 하나의 능력치가 된 것. 코로나19로 원격 근무가 일상이 되고 자율 출퇴근제가 여러 기업으로 퍼져나가면서 역량을 갖춘 프리랜서의 세상이 열렸다. 책 <개인의 시대가 온다>에서 저자 서준렬은 “지금 세상이 개인의 시대가 되었다는 징후는 너무도 명백해졌다. 기술, 문화, 제품과 서비스,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모두 개인을 향하고 있다. 특히 기술의 발전은 개인이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이 하나의 미디어가 된 지는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정한 고용 시장은 ‘집단의 시대’에서 ‘개인의 시대’로의 전환을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말한다. 개인이 브랜드가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 잘 키운 부캐는 부수입을 부르고 이를 통해 ‘월급이 없는 삶’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립할 수 있는지를 미리 실험해보기도 한다. 늘어난 수입을 통해 조기 은퇴를 꿈꾸거나 사이드 잡을 통해 가능성을 엿본 후 과감히 프리랜서로 전업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부캐를 찾는 이유가 제2의 인생이나 돈 때문만은 아니다. 일만 하느라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공허하게 느껴지는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등 각자 다른 이유로 부캐 찾기 여정을 떠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업을 더 열심히 하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매일을 더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나아가 부캐로 획득한 능력을 본업에 발휘해 예상치 못한 성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전혀 다른 장르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만들어내는 창의력의 힘. 부캐를 기르는 것이 더 이상 회사 몰래 하는 딴짓으로 취급받지 않아야 할 이유다.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자신의 저서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에서 “아무리 좋은 도구라고 해도 달랑 하나만 가지고서는 복잡하고 상호 연결되어 있고 급속히 변하는 세상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금은 그런 세상인 것이다. 게다가 단체의 목표를 위해 질주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행복이 중요한 세대가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지금도 유효하지만 촘촘한 관계가 아닌 느슨한 연결을 원하는 시대. 본캐로만 살아가는 게 언택트 시대의 인류에게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우리 안의 부캐를 길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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