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사회, 그리고 여성

조회수 2021. 2. 8. 18: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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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방지법은 끝나지 않았다, 남녀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노력.

2006년 MBC에서 방영된 <거침없이 하이킥>은 한방병원 원장 이순재(이순재 분)를 중심으로 3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시트콤이다. 초반에는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다가 20화를 기점으로 화제를 끌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무렵 본방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마 ‘짤방’이나 ‘움짤’ 등으로 한번쯤은 접했을 그 장면, ‘야동순재’ 덕분이었다. 평소 엄격하고 근엄하며 가족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가부장 이순재는 아들 준하(정준하 분)의 노트북 컴퓨터에 담긴 음란물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들이 파일을 감춰놓았고, 현대 문물에 어두운 그로서는 찾아낼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노트북에 대고 소리를 친다. “야동! 야동 나와라!” 당시 시청자들은 포복절도하며 발칵 뒤집혔었다.

같은 해, 그만큼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배경은 심천이라는 지방 소도시. 그 도시의 대학에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다. 그 중심에는 조은숙(문소리 분) 교수가 있다. 묘한 성적 매력을 풍기는 그를 가운데 두고 남자 교수들은 기혼 미혼 가릴 것 없이 발정난 개처럼 꼬리를 쳐댄다. 은숙은,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줄 듯 안 줄 듯’한 태도로 남자 교수들을 가지고 논다. 그렇게 약이 오른 유교수(유승목 분)는 은숙이 10대 시절부터 남자들과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가져왔으며, 심지어 그 당시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는 은숙에게 그런 ‘과거’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남자가 자신이라며 본인의 구애를 받아달라고 요구하지만, 은숙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앞서 말했지만 두 작품은 모두 2006년에 나온 것이다. 불과 14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청자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설정과 장면의 연속이기도 하다. 2020년의 우리는 ‘야동’을 보는 근엄하고 진지한 할아버지의 모습 앞에 폭소를 터뜨리거나, 10대 시절 찍은 성행위 영상을 놓고 모종의 흥정을 하는 장면을 블랙코미디로 소비하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2006년에서 2020년까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섹슈얼리티와 영상물, 그리고 디지털 성폭력 등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은 큰 전환점을 돌았다. 2000년대까지는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고 보편타당한 선을 도모하는 것은 어쩐지 ‘쿨’하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졌다. 이순재가 보는 것은 ‘야동’이 아니라 포르노이며, 설령 배우에게 출연료를 제공한다 한들 포르노는 많은 경우 배우에 대한 성적, 경제적 착취를 수반하게 마련이므로, 그런 내용을 방송에서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식의 비판은 ‘분위기를 깨는 소리’쯤으로 취급되게 마련이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빨간 마후라> 영상을 영화의 소재로 삼는 것에 대해 당시에도 논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중학생의 성행위 장면에 ‘어려 보이는 성인 배우가 찍었다’고 해명하자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쿨하지 않게시리 무슨 소리냐'는 식의 반응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 배우, 모 가수 등이 사생활이 담긴 영상 유출로 큰 타격을 입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지만 2006년의 대한민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n번방 같은 범죄일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을 담은 영상에 대해, 그런 영상을 ‘다들’ 봤다는 사실에 대해, 온 나라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농담의 소재로 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과 14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지난 5월, 20대 국회는 마지막 회기에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불법 성적 촬영물의 경우 피사체가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이라 해도 소지, 구입, 저장, 시청하는 행위 모두 처벌 가능하다.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 반포하는 행위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의 대상이다. 설령 직접 찍은 것이라 해도 당사자의 의사와 달리 유통할 경우 처벌 받을 수 있다. 원치 않는 영상을 찍거나, 원치 않는 방식으로 퍼뜨리는 것 모두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한 셈이다. 이러한 변화가 저절로 찾아온 것은 아니다. 2015년만 해도 성인 웹사이트 ‘소라넷’의 자주 바뀌는 접속 주소를 유포하는 트위터 계정의 팔로워는 38만 명에 달했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그런 사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IP만 차단하는 식이었다. 주로 젊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풀뿌리 활동가들이 직접 문제 제기를 하고, 인터넷을 넘어 오프라인 조직을 만들어 여론전에 나서면서 사태가 조금씩 달라졌다. 인터넷에 그토록 흔히 떠돌고 있는 그것들은 ‘야동’도 아니고 ‘추억’도 아닌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못마땅해하고 있을 것이다. 온 나라가 페미니즘이 강요하는 성적 엄숙함에 짓눌려 있다고 어딘가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은 틀렸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더욱 확산되고 관련 처벌이 강화되지 않는 한 날로 지능화되는 새로운 디지털 성범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박사방’의 주범들이 잡혀 들어가고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10여 년 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일지 끊임 없이 질문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지난 세월 여성을 인터넷 세계에서 성적 대상, 콘텐츠로 소비해온 남성주의 성범죄의 연대기를 지금 끊어내야 한다. 다시 2006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성들이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필요하다.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고통 받는 게 당연한 세상,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게 비로소 모두가 평등한 ‘쿨’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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