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전성 시대
마감 기간 새벽이면 유튜브를 찾는다. 몸과 기분이 더부룩 할 때 요즘 유일하게 웃음이 트이는 곳이다. 내적 댄스를 유발하고 책상 밑 발을 구르게 하는 채널은 바로 <SBS KPOP CLASSIC>이다. 1990년대 <SBS 인기가요>를 24시간 스트리밍하는 이 채널에서는 김완선, 유승준, 핑클 등 90년대 가수들의 무대를 감상할 수 있다. 지난 8월 계정 개설 이후 동시 접속자 2만 명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노래도 노래지만 이 채널은 각종 드립이 난무하는 채팅창을 꼭 함께 봐야 한다.
MBC도 만만치 않다. <보고 또 보고> <커피 프린스 1호점>과 같은 드라마를 25분 내외로 편집해 보여주는 ‘옛드’의 구독자는 무려 225만 명이다. 예능으로는 <무한도전> <무릎팍도사> 등의 예능을 편집한 ‘옛능’도 있다. SBS와 MBC보다 구독자수는 적지만 KBS 또한 옛 콘텐츠를 활용한 채널을 운영한다. 유튜브의 탑골 콘텐츠를 경험한 방송사는 이제 그 무대를 방송으로 옮겨온다. 옛 콘텐츠를 활용한 실험은 예능에서 특히 적극적이다
경연 명가 Mnet은 1세대 래퍼를 소환해 서바이벌을 열었다. 2000년대 힙합신의 중대한 역할을 한 주석, 45RPM, 원썬 등을 소환한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아재 래퍼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며 경쟁했다. 이외에도 음악 퀴즈쇼 <퀴즈와 음악사이>, 김희철과 김민아를 주축으로 편성한 KBS Joy의 신작 <이십세기 힛-트쏭>도 1990~2000년대 음악이 주제다. 90년대 가요를 외국인의 목소리로 듣는 <탑골 랩소디>, 80년대부터 2000년대 시대별 이슈를 정리한 토크쇼 <지지고 복고>도 한 시절을 주제로 담는다. 방송국 하드 깊숙한 곳에 있던 콘텐츠가 어쩌다 빛을 보게 되었을까.
3050은 추억을 곱씹고 1020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로 흡수되는 레트로는 수동적 감상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에게 추억의 드라마와 예능, 음악은 일종의 놀이다. 서로 다른 세대가 하나의 콘텐츠에 반응하는 극적인 호응은 각종 드립으로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이미 아카이빙된 영상을 사용함으로써 제작비 절감 효과까지 거둔다. 매체의 확장과 더불어 OTT 서비스의 등장으로 방송사는 시청자를 TV 앞에 모시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MBC와 KBS는 지난해 월화드라마를 폐지했다. 올해 상반기부터 재편성이 되기는 했지만, 공중파의 골든타임으로 알려진 오후 10시 편성이 없어진 건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오후 9시에 미니시리즈를 편성하고, 반응이 좋은 예능을 오후 10시로 옮기고, 한 회를 3부에 걸쳐 방송하는 변주는 공중파의 사정이 녹록하지 않음을 대변한다. 제작과 편성, 송출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꾀하는 이들에게 제작비 절감은 꽤 큰 이슈다. 지금과 다른 감수성으로 제작한 음악과 예능, 드라마는 새로움 중독에 빠진 우리에게 별식이다. 과거의 영광을 잠시 빌리는 레트로 콘텐츠에는 분명 유통기한이 있지만,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한 유명인의 다이어트 명언처럼 익숙한 맛이 기존 콘텐츠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대안이라는 건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