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겐 가장 완벽한 속옷

조회수 2021. 2. 9. 17: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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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제리에 대한 기준이 바뀌다! 여성의 가치관에 맞춰 변화한 속옷.

1 매각 이후 변화된 빅토리아 시크릿의 디자인.

2 빅토리아 시크릿은 매 쇼마다 판타지 브라를 선보였다. 2018년 패션쇼 당시 선보인 판타지 브라의 마지막 주인공이 된 모델 엘사 호스크.

3 2018년 11월에 열린 빅토리아 시크릿의 마지막 패션쇼.

4 빅토리아 시크릿 SNS에 업로드된 속옷의 제작 공정.

5 미국 뉴욕에 위치한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

가슴이 봉긋이 솟아오를 무렵, 그러니까 2차성징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 보정 속옷을 입었다. 체육시간이면 답답해서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여성들의 의무로 자리한 이 갑옷은 성인이 된 후에도, 컴퓨터에 앉아 밀린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옥죄고 있다. 대단히 예쁜 가슴으로 자랐는지는 모르겠다. 보정을 하지 않은 채 성인이 된 사람들의 가슴 모양에 대한 데이터가 없으니까. 보정 속옷은 나이와 외모에 맞게 와이어가 삽입된 속옷으로, 두터운 패드가 장착된 속옷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20년이 지난 시간 동안 브라를 장착하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화려한 레이스에 가터벨트를 착용하고 야한 표정을 흘려야 할 것만 같은 시뻘건 색의 속옷은 입기도 전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손가락 길이 정도는 될 법한 두께의 패드와 푸시 업 스타일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디자인을 보고 있자면 늘 생각의 회로는 한 방향으로 흘렀다. 누구를 위한 속옷인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패션계 최대 화두 중 하나였던 빅토리아 시크릿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보디 포지티브를 지향하지만 빅토리아 시크릿이 가진 판타지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진 않는다. 다만 브랜드에서도 인지했듯 ‘이제는 사업의 목적성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1995년부터 매해 11월이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달군 23년 동안의 패션 판타지에 현실적 감각을 대입해야 할 때다. 물론 빅토리아 시크릿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방향에서 말이다. 부진한 매출 실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2019 S/S 리한나가 뉴욕 패션 위크에서 란제리 브랜드 새비지×펜티를 선보이면서다. 첫 시작은 다양성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다음 해에는 아마존과 독점 계약을 통해 전 세계 200여 나라 및 지역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진행했다. 늘씬한 몸에 원 사이즈 모델로 구성된, 그러니까 1982년에 패션업체 L 브랜즈가 창업자 로이 레이몬드에게 빅토리아 시크릿을 인수하면서 시작한 ‘앤젤’ 패션쇼의 시대가 지났음이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1977년 여성들의 쇼핑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로이 레이먼드가 아내에게 속옷을 사다주는 것에 어색함을 느껴 만들어진 브랜드다. 매각 후 브랜드를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계 혼혈에 섹시하고 당당한 가상의 인물 ‘빅토리아’를 설정해 마케팅을 펼쳐 지금의 이미지인 판타지를 이끄는 대표적 브랜드가 됐다. 첫 번째 속옷 패션쇼를 펼친 상징적 브랜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때 패션쇼의 시청 가구수가 1000만 가구에 달하고, VIP 티켓이 장당 2만5000달러에 팔리던 날은 지났다. 미국 속옷 시장에서 41%가 넘는 비중을 차지했던 시장점유율이 5년 만에 반토막이 나고, 시청률은 1/4로 떨어졌다. 미투부터 탈코르셋 운동까지 이어지던 시점에 빅토리아 시크릿의 수석 마케팅 담당자 에드 라젝은 “트랜스젠더 모델이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판타지의 본보기가 아니다. 그런 모델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전하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는 매출 급감으로 이어졌다. 이후 거세진 비난에 트랜스젠더 모델인 발렌티나 삼파이우를 기용했지만 신뢰 회복은 어려웠다. 안티트랜스젠더로 불린 수석 마케팅 책임자의 사임 발표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9년 9월 새 CEO를 토리버치에서 영입하고, 핑크 라인의 광고를 전면 개편했으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강하게 굳어진 이미지를 뒤집기엔 마니아층이 남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결국 브랜드는 2019년 11월 21일 패션쇼 폐지 결정을 발표했고, 2020년 2월 20일 사모펀드 시커모어 파트너스에 지분 55%를 매각했다. 물론 소비 트렌드를 좇아가지 못한 오프라인 매장 위주의 판매 전략도 한몫 톡톡히 했다.

섹시함의 기준이 변한다. 남을 위한 기준이 아닌 나를 위한 기준으로 주체가 바뀐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23년 만의 변화는 앞으로의 20년을 좌우할 거다.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속옷 브랜드가 도약을 예고한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 마네킹까지 선보인 나이키, 포토샵 중단을 선언한 아메리칸 이글의 속옷 브랜드 에어리, 다양한 여성상을 위한 속옷을 내세운 리한나의 새비지×펜티까지,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난 확실한 캐릭터만이 굳어진 인식을 바꿀 전환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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