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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야잡] 한국 야구의 첫 시작, 황성YMCA야구단을 아시나요?

조회수 2021. 5. 6. 14: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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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USF = 글, 제작 정은교 기자] “알쓸야잡”은 알아두면 쓸모 있는 야구 잡학사전의 약자로 야구의, 야구에 의한, 야구를 위한 모든 정보들을 방출하기 위해 기획된 시리즈이다. <알쓸야잡>의 첫 시작에 맞춰 야구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첫 시작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2021 KUSF 대학스포츠리그가 축구를 시작으로 야구, 배구, 농구까지 모두 개막하였다. 작년부터 이어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움츠렸던 대학 스포츠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학 리그의 개막은 코로나19로 지쳐있던 많은 대학 스포츠 팬들에게 큰 위안과 활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는 대학. 리그처럼, 당시 억압적인 시대 환경 속에서도 야구의 역사를 이어나가며 현재 대학야구, KBO 등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한국 최초의 야구 구단 황성YMCA야구단(이하 YMCA야구단)의 발자취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한국 최초의 야구 구단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기독교청년회)가 만든 ‘황성YMCA야구단’이다. YMCA는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줄임말로, 영국에서 산업혁명 당시 혼란했던 사회 속 젊은이들의 영적, 정신적 상태를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시초이다. 그후 전세계로 퍼져나가며 1903년 한국에도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 활동이라는 목적 아래 스포츠를 매개체로 삼아 많은 사업들을 전개하였고, 이에 많은 서구 스포츠-야구, 배구, 농구, 축구 등-이 한국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대 배경 속 스포츠의 요람이 되며 한국 스포츠의 맥을 이어준 셈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야구를 한국에 도입하였던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한국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필립 질레트’이다. 1901년 황성 YMCA 총무로 내한한 선교사 질레트는 1903년 당시 미군들이 공을 주고 받는 낯선 모습(캐치볼)을 관심있게 구경하던 청년들을 지켜보다 YMCA야구단을 창단하기로 결심했다. 전직 야구선수 출신이기도 했던 질레트는 미국에서 야구 장비들을 들여와 조선 청년들에게 직접 가르치며 야구를 전파하였다.

  이렇게 탄생된 YMCA야구단은 한국 야구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다. 신기한 서양식 공놀이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당시 많은 학교들(휘문의숙, 배재학당 등)의 새로운 야구팀 창단을 이끌었고 야구의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하였다.

  YMCA야구단은 당시 관립영어학교, 경신학교, 배재학당 등에 재학 중인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YMCA에서 야구를 배웠던 회원들은 다시 이들의 학교로 돌아가 야구를 지도하며 학원스포츠를 발전시켰다. 

  1904년 창단된 YMCA야구단은 1906년, 훈련원(조선시대 무과 시험 및 군사훈련장-운동장으로 활용)에서 덕어 학교와의 경기를 가졌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 간의 최초의 야구경기이다. 당시 제대로 된 장비가 없었던 탓에 선수들은 무명 적삼에 짚신을 신고 경기를 뛰었고, 양 팀이 배트 하나를 돌아가며 사용하였다. 외야수는. 맨손으로 공을 받기도 했다. 또한, 경기장을 비롯하여 규칙과 포지션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엉거주춤한’경기였다.


  그러나 YMCA야구단이 새롭게 각성할 수 있었던 큰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09년 동경유학생야구단의 고국 방문경기이다. 이들은 처음 보았던 유니폼과 스파이크를 비롯하여 번트, 히트앤런, 더블플레이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던 모습을 보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은 YMCA야구단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팀의 기강을 다시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10년에서 1912년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팀이 되어 전성기를 맞이 했던 YMCA야구단은 조선 내 일본인 야구 팀들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1912년 일본으로 원정 경기를 갔던 YMCA야구단은 일본의 중등·대학 팀들과 총 7경기를 가지기도 했다.(1승 1무 5패의 기록) 비록 패배가 많은 경험이었지만, 이 경기를 통해 선진 야구 기술을 습득하며 팀의 도약을 이끌었다.


  한국 야구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되었던 YMCA야구단이었지만, 1913년 105인 사건과 함께 위기가 찾아왔다. 야구단을 창단했던 질레트는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했고, 주축 선수들 마저 유학 길에 오르며 YMCA야구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며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이들의 의지와열정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남아 이어져 올 수 있었고, 한국 야구의 역사는 계속 될 수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한국 최초의 야구 구단이지만, 이들의 역사를 기억해주고자 하는 움직임들은 계속되고 있다. 영화 ‘YMCA 야구단(2002)’은 YMCA야구단의 창단 과정과 경기 모습들을 담아냈으며, 1904년 첫 창단 이후 약 100여년 만에 사회인 야구단으로 돌아온 YMCA야구단은 불암사와의 공식 경기를 시작으로 재창단을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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