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에서의 화려함 그 뒤엔 노력,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지민지 선수를 만나다

조회수 2021. 4. 27. 11: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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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선수에서 피겨선수로

┃미국에서의 번아웃을 이겨낸 이유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변명이다’

┃피겨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제주도의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민지 (사진제공=본인)

[KUSF=이주 기자] 꽃이 지고 풀잎이 가득 거리를 채우는 봄, 따듯한 날씨와 대조되는 차가운 빙판 위에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피겨 선수가 있다. 12살의 늦은 나이에 시작해 23살의 나이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소속 지민지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소속 학교가 위치한 세종의 작은 카페에서 지민지 선수를 만나보았다.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국제스포츠학부 19학번 지민지입니다.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집에 있기보다는 놀이터나 운동장에 가서 되게 활발하게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생 때 육상부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피겨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친언니였습니다. 겨울방학에 언니가 친구와 아이스링크장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언니가 부러웠고, 부모님에게 아이스링크장을 가자고 졸랐습니다. 링크장에서 선수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어설프게 흉내를 내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부모님께서 강습반에서 피겨를 해보지 않겠느냐 제안하셨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피겨 선수를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라고 생각됩니다.

피겨는 사실 6살, 7살에 시작합니다. 저는 12살에 시작했으니 거의 6년 차이가 납니다. 당시에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은 없었고, 취미로 피겨를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겨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그때부터는 잠도 줄여가고, 친구들이 쉴 때 한 번이라도 더 타려고 했습니다.


울산에 남다른 기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링크장과 집이 끝과 끝이어서 자주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차로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당시 울산 소속 선수가 혼자였는데 울산피겨연맹도 그때 처음 생겼습니다. 소속선수가 혼자다 보니 울산에서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운동할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울산 후배들이 생겼으면 했는데 저 이후로는 선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울산에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는 아이스링크장이 있었나요?

대구로 다녔습니다. 역까지 가는 시간, 기차 기다리는 시간을 모두 계산해보면 1시간 30분씩은 걸리는데 4년 정도는 긴 시간을 투자하면서 훈련했습니다.


피겨선수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중학생 시절이 궁금합니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수업을 들은 후 학교에서 나오면 어머니께서 차를 가지고 학교 앞에 계셨습니다,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이 많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수련회, 현장체험 등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이 없습니다. 체육대회도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학교생활 자체도 기억에 많이 없고, 친구들을 사귀기에도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 같은 반 친구들이었지만 같은 반이 아닌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고등학교 1학년 3월에 LA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페어라는 종목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이 페어라는 종목이 우리나라에는 선수층이 거의 없습니다. 페어를 가르쳐주는 코치나 공간도 마땅치 않아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타지에서 훈련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훈련했기 때문에 학교에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당시 외로움을 많이 타서 번아웃도 많이 왔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훈련에 대한 측면에서 힘들었고, 아버지는 당시 금전적인 지원을 계속 해주셔야 했고, 건강도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그만두면 모두가 편해질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당장 짐 싸서 한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당시 힘들었던 미국 생활을 이겨낸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어머니였습니다. 저를 너무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당근이 필요할 때는 당근이 있었고, 채찍이 필요할 땐 채찍을 주셨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당시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대회 참가가 잦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차 적응이나 컨디션 관리 측면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요?

생각보다 일정이 엄청나게 빡빡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마인드컨트롤을 한 것도 있습니다. 일부러 힘들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몸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뇌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좌우명이 ‘노력’ 그 자체라고 말하는 지민지 (사진제공=본인)


힘든 생활에서 도움을 준 좌우명이 있나요?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변명이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저는 늦게 운동을 시작했고,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 6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친구들 잠자는 시간에도 더 많은 노력을 하려고 했습니다. 훈련에서도 시합에서도 계속 그 말을 생각했고, 그때그때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덤덤하고 강인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렇게 강한 선수에게도 ‘루틴’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루틴이 있었습니다. 준비시간 후, 시합에 들어가기 직전에 스케이트 끈을 다시 묶는 식이었습니다. 쇼트 날 시합을 잘했다면, 그 날 신었던 스타킹을 프리 때도 입었습니다. 다른 선수들 루틴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바나나를 먹지 않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부상이 잦은 편이었나요?

없진 않았지만,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튼튼한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엄청나게 아팠을 때를 생각해보자면 중학생 때 엉덩이 뼛조각이 떨어져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1~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잘 던지는 편이었습니다.


학업성적도 우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학년 1학기에 4.5 만점을 받았습니다. 2학년 2학기에는 4.41을 받아 아쉽게 만점을 놓쳤습니다. 하이엔드 스포츠(승마) 수업에서 A+을 받지 못했습니다. 시즌이 겨울에 있으니 비시즌에는 공부에 몰입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잘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학업 외에도 전문스포츠지도사(피겨) 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수와 현장실습이 남은 상태입니다.


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대학은 꼭 가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고등학생 때 대학 선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피겨선수들 대부분이 김연아 선수가 졸업한 ‘고려대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합니다. 저 역시도 그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더불어 10년 동안 피겨를 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은퇴 후 나머지 20년 30년은 피겨가 아닌 스포츠의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오면 내가 잘 몰랐던 길들과 다른 스포츠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COVID-19로 인해 시합 출전을 못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답답한 것이 가장 큽니다. 선수가 너무 막연히 준비해야 합니다. 시합이 언제 열릴지도 모르고, 어떤 시합을 준비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연습 시간이나 장소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힘듭니다.


대학스포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아무래도 대학선수로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 해보니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합니다. COVID-19로 인해 의욕도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질 텐데 모두가 조금 더 버텼으면, 힘냈으면 좋겠습니다.


‘강단 있다.’, ‘강인하다.’ 지민지를 봐 온 사람들이 지칭하는 단어이다. 울산 유일의 피겨선수 타이틀, 미국에서의 외로운 선수 생활, 평창 동계올림픽의 좌절을 모두 이겨내고 지민지는 결국 전 국가대표의 타이틀을 얻었다. 하루빨리 지민지가 다시 빙판 위에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무대를 보여주는 날을 기다리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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