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장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전 아이스하키선수 허진영 (1)

조회수 2020. 9. 1. 11: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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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영 증명사진 ( 출처 : 허진영 본인 제공)



[KUSF=글, 사진 김소연 기자] 아이스하키는 필드하키를 빙상에서 진행하는 종목으로 매우 빠르고 격렬한 운동이다. 운동이 격렬한 만큼 선수들의 체력소모도 큰 편이어서 수시로 선수 교체를 하므로 한 팀이 총 22명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아이스하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누구보다 컸지만, 부상으로 원치 않는 은퇴를 하게 된 연세대학교 전 아이스하키선수 허진영을 만나보았다. 이번 1부에서는 그의 선수 시절과 아이스하키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던 그의 선수 시절 

 허진영은 아이스하키 선수로 연세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하여 2학년 때 아이스하키를 그만두고 이번 2020년 1학기에 교생실습까지 마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농구 축구 등과 같은 구기 종목의 운동을 좋아하였는데 아버지가 부모와 자녀가 같이 활동하는 아이스하키 동호회에 가입하면서 누나와 함께 8살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클럽 위주의 활동으로 엘리트보다는 취미로 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이후 일반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가 하고 싶어 아버지를 설득하여 본격적인 엘리트 선수로서의 생활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광운중학교 아이스하키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와 약속한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비전이 보여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조건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의 피나는 노력은 경복고 진학과 U-20 국가대표 선발의 결과로 이어졌다. 허진영은 이후 연세대학교에 아이스하키 선수로 입학하는 탄탄대로를 밟아왔지만, 대학교 2학년 때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선수 생활 중 기억에 남는 경기와 장면 

 현재 허진영은 아이스하키 선수 생활을 은퇴하며 선수로서 링크장을 떠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잊지 못하는 선수 시절의 순간이 있었다. 바로 그가 경복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때다. 당시 허진영이 재학 중이던 경복고가 아이스하키 고등부에서 전통적인 강호였고 이에 맞서는 팀은 다크호스로 떠오르는 신생팀 선덕고로 두 학교가 경쟁 구도에 있었다. 2012년도에 두 학교가 6번 맞붙었는데 모두 선덕고에 결승전에서 패배하였었다. 연습경기에서는 한두 번 정도는 경복고가 승리했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선덕고에 전패로 2012년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한 해가 지나고 2013년 동계체전 결승전에서도 선덕고와 경복고가 맞붙었는데 이때 허진영이 속한 경복고가 팀원 모두가 하나 되어서 선덕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 점씩 주고받다가 3 : 2로 경복고가 승리하였는데 당시 감독 또한 이때 경기력은 대학팀보다도 뛰어났다고 칭찬했을 만큼 좋은 경기력이었기 때문에 그는 2013년 동계체전 결승전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회상하였다.  

 물론 허진영은 연세대학교 입학 후에 연고전이라는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을 기대했지만 부상으로 인한 은퇴로 연고전을 뛰어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고 밝혔다.

▲아이스하키 선수 시절 허진영의 모습 ( 출처 : 허진영 본인 제공)



◈연세대 아이스하키 대학 학생선수로 사는 삶

  허진영이 연세대학교 아이스하키 선수로 입학할 당시는 학생선수 최저학점 제도가 없을 당시여서 당시 운동부 스케줄은 학업보다는 운동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운동부 기숙사가 따로 있지만, 축구, 농구, 야구, 럭비 종목과는 다르게 아이스하키부는 전원이 본가가 서울이어서 기숙사와 본가 거주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자신의 운동 스케줄은 아침 6시에 버스를 타고 링크장으로 이동하여 8시부터 10시까지 아이스 타임(링크장에서 훈련하는 시간)이고 이후 학교로 돌아와 학교생활을 하다가 4시부터 6시까지 다시 사이클, 운동장 뛰기, 계단 오르기 등의 지상훈련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고 전했다. 단체 운동 스케줄이 절대적으로 우선이었기 때문에 수업과 운동 시간이 겹치면 결석계가 나와서 수업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6년도 정유라 사건 이후 최저학점 제도와 필수 수업일수 등이 생기면서 성적관리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허진영은 고등학교 때에는 운동하다가 힘들어도 기량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스트레스 풀 시간조차 없이 개인훈련에 매진하였다. 대학 입학 후에는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기거나 하루 정도 놀러 가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며 웃음 지었다.  



◈아이스하키 선수 생활이 그에게 미친 영향 

 아이스하키 선수 시절, 허진영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공격수로 뛰고 있는 Evgeni Malkin의 백넘버인 71번을 따라 연세대학교에서 백넘버 71번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창 기량이 최고조로 올라왔을 때는 ‘자기 효능감이 100%로 충전되어 있다’ ‘누구든지 내가 다 이길 수 있다’ 와 같은 마인드컨트롤도 잘 되고 자신감도 많았다고 전했다. 아이스하키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매우 올라갈 수 있었다고 전하며 은퇴 이후인 지금도 여기서 얻은 자신감을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하고자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선수 시절, 그의 루틴 

 운동선수에게는 누구나 시합 직전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흔히 이 행동을 루틴이라고 부르는데 허진영에게 루틴은 시합 직전 아침으로 순대국밥을 먹는 것이었다고 한다. 든든하게 식사를 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하며 시합 들어가기 직전 아대와 무릎보호대 고정을 위해 테이프를 감는 방법도 정해져 있었다고 밝혔다. 끈 묶는 세기, 글로브와 같은 장비를 착용하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고 헬멧을 쓰고 두 번 때리고 링크장에 들어가는 루틴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동료선수 중에서는 링크에 들어갈 때 점프해서 들어가거나 무조건 오른쪽 발부터 들어가는 선수들도 있었다고 말하며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루틴이 굉장히 다양하다고 전했다. 

▲현역선수 은퇴이후 유소년 코치로 활동 중인 그의 모습 ( 출처 : 허진영 본인 제공)


◈정든 만큼 힘들었던 아이스하키와의 이별

 아이스하키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컸던 그가 선수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 부상이라는 장애물이 그를 계속 방해하였다. 운동선수라면 한 번씩은 부상을 당하는 편이지만 그는 심한 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무릎 수술을 양쪽 다 한 번씩 하고 연세대학교 진학 당시에도 무릎 수술을 양쪽 한 번씩 더 해서 총 무릎 부분의 수술을 두 번 하였다고 한다. 두 번의 무릎 수술 여파로 이후 재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량이 예전만큼 올라오지 않아 당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 U-20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재활 이후 복귀한 지 두 달도 안 되었던 시점이라 기대 수준에 본인이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더해져 이 대회 이후 선수 생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다가 무릎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이스하키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가 아이스하키를 좋아했던 만큼 그에게 은퇴는 정말 힘든 결정이었다.  



허진영은 악바리 근성으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운동이 힘들면 오히려 더 훈련에 매진하며 땀을 흘려 U-20 국가대표와 연세대학교 입학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낸 선수였다. 운동을 그만둔 이후인 현재에도 인터뷰하면서 선수 생활을 회상하며 웃음 짓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통해서 아이스하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아이스하키를 그만둔 이후 그가 겪었던 고난의 시간과 이제는 아이스하키가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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