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하세U] '베이징 올림픽' 보며 꿈을 키운 소년, 고려대 4번 타자 강인규-<1>

조회수 2020. 7. 3. 08: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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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타선 중심에 서있는 강인규

팀을 위해 포수 마스크도 마다하지 않아

<주목하세U>는 ‘올해 대학야구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라는 기획의도에 맞춰 글을 연재할 시리즈입니다. 야구를 시작한 계기와 대학 생활, 야구선수로서의 목표 등을 인터뷰하며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KUSF=권혁중 기자] 지난 2008년 8월,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베이징에서 기적을 썼다. 올림픽에서 9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금메달을 딴 이후 세 번째로 5인 이상의 단체 구기종목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날의 기적이 현재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야구 열풍의 진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를 보고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꿈나무들이 많았는데, 현재 고려대학교 4번 타자로 활약 중인 강인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주목하세U>를 통해 강인규를 만나보자.

강인규와의 인터뷰는 총 2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대학교 야구부 생활과 마지막 시즌을 맞이하는 강인규의 심정과 각오에 중점을 맞춰 인터뷰를 진행했다.

*4번 타자 강인규가 되기까지...

대한민국 대표팀이 쿠바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땄을 때, 강인규는 찜질방에 있었다. “저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타구가 박진만 선수, 고영민 선수, 이승엽 선수에게 차례로 가서 경기가 끝난 순간이요. 경기가 끝나자마자 찜질방에 있던 저 포함, 모든 사람들이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야구라는 종목이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그렇게 야구선수라는 꿈을 갖게 됐다.

하지만 야구선수로서 강인규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강인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기본기가 부족했다. “다른 종목도 비슷하겠지만, 야구라는 종목은 구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치고 던지고 잡는 자세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돌이 깎이면서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기본기를 잡기까지 여러 번의 고난이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좋지 않은 평을 받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강인규는 포기하지 않았다. 피나는 노력 끝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강인규는 3학년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신월중 최초로 야구 명문 덕수고에 진학했다. 덕수고에서도 4번 타자로 자리를 잡아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3학년 청룡기에서는 5경기에서 9타점으로 팀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또한 타점, 홈런, 최우수선수를 포함하여 3관왕을 차지하는 명예까지 안았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야구선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많은 이들은 강인규의 프로 입단을 예상했다. 하지만 강인규의 선택은 대학진학이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온전한 저의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학교에 가서 기본기를 더 키우고 다시 프로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판단한 강인규는 대학에서 더 발전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한 뒤 프로에 도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변 감독과 코치도 그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강인규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4번 타자 강인규, 고려대의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거듭나다.

입학 첫해부터 강인규는 고교시절의 타격감을 이어나갔다. 3할을 비롯해 홈런을 5개나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선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합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던 강인규는 고등학교 3학년 청룡기 대회 3관왕의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당당히 증명했다. 이에 대해 “학교의 명예와 프로진출을 위해 노력하는 4학년 선배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했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진 거 같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강인규는 고려대 입학 후 정기전에 대한 로망이 컸는데, 입학하자마자 정기전 선발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심지어 정기전 때 안타를 쳐서 타점을 올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강인규는 수많은 고려대 학우들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친 상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대 중심 타선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강인규는 2학년 때부터는 포수 마스크를 썼다. 팀의 포수가 모두 부상을 당해 포수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던 강인규가 쓰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연습량도 적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많이 힘들었습니다”고 말했다. 포수는 책임감이 막중한 포지션이다.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서는 다른 포지션보다 전문적인 기본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강인규에게 포수 자리는 무거웠다.

특히 도루저지가 힘들었다고 했다. “주자가 2루에 슬라이딩을 하고 세이프 판정을 받을 때마다 팀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우 힘들었습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강인규도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레 타격 저하에도 영향을 끼쳤고, 2학년 때 잠시 주춤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강인규는 위기를 발판으로 삼았다. 웨이트 훈련과 팔굽혀펴기, 복근운동 등으로 체력을 기르고, 기술적으로는 포수 출신인 김호근 감독의 지도하에 훈련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지만, 제가 노력한 만큼 점점 실력이 좋아지는 것이 보여서 희망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강인규는 3학년 때 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타격적인 면에서도 0.316의 타율과 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기량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포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포수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모든 포지션을 지휘한다는 장점이 있고, 투수들이 포수가 원하는 곳에 공을 던져 승리를 거뒀을 때,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프로에 진출하게 된다면, 포수로 전향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 중인 강인규다.

팀을 위해 포수 마스크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강인규는 4번 타자의 자리도 꿋꿋이 지켰다. 득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 방을 날리는 것이 4번 타자의 임무기 때문에, 그 자리가 대개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인규는 4번 타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다. 4번 타자라는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에는 “타격이 부진할 때에도 감독님과 코치님이 4번 자리를 믿고 맡겨 주셨고, 팀 동료들도 저를 응원해줬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감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제는 고려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가 된 것이다.

*“감독님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강인규를 만들어준 사람들

베이징 올림픽을 보고 야구선수라는 꿈을 키운 어린 소년이 고려대학교 4번 타자로 자리를 잡기까지 강인규에게는 특히 지도자 복이 많았다고 한다. “제가 야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격려해주셨던 잠신중 감독님과 신월중 감독님, 그리고 야구 선수로서의 실력을 키워주시고 진로를 열어주신 덕수고 감독님과 코치님들, 그리고 대학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제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 애써주신 고려대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포기할 뻔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옆에서 격려해주고 이끌어준 지도자들 덕분에 지금의 강인규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인규와의 인터뷰 <2>편에서는 마지막 시즌의 준비 과정과 심정에 대해 다뤄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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