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근성' 김성모의 30년 만화 인생 이야기

조회수 2021. 3. 28. 05: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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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 열정, 도전, 끈기로 채운 30년 만화 인생, 만화 작가 김성모

'역사적으로 이게 약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 너무 멋지다', '이제부턴 정말 공부뿐이야',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다면 나이가 어리더라도 이 멘트의 만화 '짤'은 한 번씩 봤을 텐데요. 29년 차 만화 작가 김성모는 이렇게 수많은 짤로 끊임없이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과거 만화로만 만화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해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데요.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주간지에서 단행본으로, 단행본에서 웹툰으로, 코믹스에서 성인물로 움직이는 등 끊임없이 자신의 포션을 찾아 나섰던 만화계 최고의 허슬러입니다.


근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김성모의 만화 인생에서 EO가 평소와는 또 다른 결의 기업가정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만화 작가 김성모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만화작가 김성모입니다.

만화 작가 김성모와 그의 가족들

Q. 작가님의 유년 시절부터 파고들어 볼까요? 


어렸을 때 좀 불우하게 컸어요. 초등학교 3,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저희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어요. 제 밑으로 동생이 두 명인데, 홀애비가 되셔서 세 명을 키우셨죠. 어머니가 있을 때는 굉장히 유하게 컸는데, 우리 아버지는 정말 강하고 현명한 남자셨어요. 우리 삼남매를 아주 잘 키우셨어요.


옛날에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정서가 있잖아요. '성모야. 너가 나중에 네 동생들을 다 챙겨야 하고, 네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항상 저를 이렇게 교육하셨어요. 그래서 강인한 삶에 대한 강박관념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아버지한테 배운 게 참 많아요.

만화 작가 김성모 인터뷰

Q. 만화에는 언제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셨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현세 선생님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나왔어요. 정상적인 생활이 이미 끝난 밑바닥 사람들을 모은 외인구단으로 다시 올라오는 내용이잖아요. 그 인생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희망을 줘요. 만화 속 내용이 당시 제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도시락도 못 싸서 학교에 다니고, 가면 맨날 물만 먹었거든요.


주위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비참한 생활을 몸소 하던 찰나에 그 만화를 본 거죠. 그러면서 '그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희망이고, 나는 만화가가 되어야겠다. 희망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라는 결심을 확실하게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항상 이현세 선생님의 만화를 베끼면서 만화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만화책에 나와 있는 문하생 모집 광고에 지원했어요. 근데 전화하면 안 받아주는 거예요. '중학생이 무슨 문하생이냐,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와라. 그리고 만화라는 게 단지 그림만 잘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각종 지식이나 사회를 보는 관점이 있어야 하니까 책 많이 읽어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프랑스 소설가인 기 드 모파상의 소설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고전을 중학교 때 다 봤죠.

만화 작가 김성모

Q. 본격적인 커리어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고행석 선생님 B팀이 있었어요. 화곡동에 문하생으로 들어가려고 거기를 찾아갔더니 고행석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누구랑 상의하시는데, 스토리로 고심을 많이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써볼까요?"라고 했죠. 써보라고 하셨고, 1권을 딱 썼는데 "이거다!"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고행석 선생님 이름으로 나가는 만화 한 타이틀을 제가 만들었어요. 이후에 군대에 다녀왔는데, 전역하고 나서 그때 여자친구가 자기 친구라고 소개시켜준 사람이 '보물섬' 잡지 기자였어요. 요즘에는 유명한 웹툰 작가들이 네이버에 다 있다면 그 당시에는 이현세, 허영만, 이두호 선생님 같은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 보물섬에 계셨어요.


그 기자를 만나서 제가 내가 이런 그림 그린다면서 보여주니까 몇 개월 뒤에 데뷔시켜주겠다고 하더라고요. 3일 만에 단편을 가지고 올 수 있냐고 했어요. 보통 작가들이 펑크를 내니까 기자들은 땜빵용 원고를 몇 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마침 원고가 없어서 저한테 연락을 한 거죠.


그때 <약속>이라는 작품을 3일 만에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그게 26개인가 되는 작품 중에 9위를 했어요. 반응이 좋잖아요? 연재하지 않겠냐고 제의하더라고요. 그렇게 연재를 시작해서 보물섬에서 5위권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당시 보물섬에 뭐가 있었냐면 <아기공룡 둘리>가 있었어요. 둘리랑 제 작품이 순위 다툼을 했어요.


웃긴 상황이죠. 그림은 참 개떡 같았는데, 어쨌든 인기가 있어서 여러모로 좋았어요.

Q. 그다음에는 주간지로 넘어가셨던 거로 기억해요.


잡지에 연재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만화 시장 전체 흐름 자체가 주간지로 갔어요. 보물섬 같은 잡지는 쇠퇴했고요. 지금의 네이버, 카카오처럼 주간지의 양대 산맥이 아이큐 점프와 챔프였는데요. 아이큐 점프에는 <드래곤 볼>이 있었고, 챔프에는 <슬램덩크>가 있었어요. 주간지 전성시대의 시작이었죠.


저도 이왕이면 만화 시장의 중심부로 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챔프에서 한 연재가 잘 안 됐어요. 이후에 아이큐 점프에서 낸 <마계대전>이 터진 거예요. 히트했지만, 잡지사에서 결국 원하는 건 단행본이거든요. 근데 1년이 52주이니 매주 연재한 걸 모아서 내봤자 코믹스로는 한 작가가 단행본을 1년에 5권 정도밖에 못 내요.


저는 틈새를 봤어요. 딱 보니까 잡지 시장이랑 만화방 시장 그 중간의 코믹스 시장이 엄청났어요. 그때 인기 작가였던 박산하 작가 같은 경우에는 한 작품으로 200만 부 정도를 팔았어요. <마계대전>은 한 권에 5만 부씩 나가는데, 1년에 5권을 내면 총 25만 부가 나가잖아요. 팀을 만들어서 더 열심히 하면 한 달에 5권도 가능하겠다고 봤어요.


이 방법이 분명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독자들이 얼마나 급해요. 좋아하는 작품은 빨리 보고 싶어하잖아요. 실제로 팀을 만들어서 1년에 5권이 아니라 한 달에 5권을 내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는데요. 정말 딱 적중했어요. 한 달에 20만 부씩 매달 팔리는 겁니다.


나중에는 만화계 인원들이 김성모 화실에 가면 원고료도 세고, 잘 데도 있고, 식당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한테 더 왔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그림 좀 그린다는 문하생들은 우리 화실에 다 왔었죠.

김성모 작가의 대표작 <용주골>

Q. 성인물로 방향을 바꾼 건 또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요?


1999년에 일본 만화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일본 만화를 좋아했어요. 제 만화를 보던 사람들도 그랬죠. 어느 날 화실 건물에 갔는데, 텅텅 비어 있는 거예요. 2층 구석에 12명만 딱 남아 있고요. 다 도망간 거예요. 안 되겠다 싶었고, 절대 뺏길 수 없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담은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성인물이었습니다. 한국 성인물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인 한 같은 게 서려 있어서 일본 만화와 정서가 안 맞아요. 허영만 선생님의 <타짜>같이 우리 정서에 맞는 성인용 만화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이 성인물이 몇 작품만 떴고, 시장을 형성하지는 못했어요. 코믹스를 일으켜 세웠듯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성인물 분야에 뛰어들었죠. 대신 기존의 성인물과는 포인트를 다르게 뒀어요. 좀 더 현실성 있게 가려고 했죠.


당시에 성인물 중 인기가 좋았던 작품의 장르가 다 판타지 액션이었어요. 대표적으로 신형빈 선생님의 <도시정벌>, 박봉성 선생님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있죠. 성인들이 나와서 판타지 액션을 하는데, 저는 코믹스처럼 애들 치고받고 싸우는 학원물이 아니라 더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게 성인물이니까 리얼극화로 가야 한다고 봤어요.


그래서 현실에 있는 진짜 문제를 직접 파헤쳐서 우리 삶 속의 아픔, 좌절, 절망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고요. 실제로 취재의 힘을 빌려서 <용주골>을 만들게 됐습니다.

근성의 아이콘, 만화 작가 김성모

Q. 취재 과정은 어땠고, 그 사이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용주골이 그때 우리나라 최고의 사창가였는데요. 취재를 하려고 거기를 직접 들어갔어요. 갈비뼈 몇 대 부러져가면서 아가씨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사진도 찍고 그랬죠. 진짜 건달들이랑 싸우면서 살같이 피같이 취재하니까 나중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한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실제 취재를 하면 느낌이 다르거든요. 직접 느낀 것을 작품으로 내면 또 그게 독자들의 마음에 바로 전달되고요. 그러면서 '취재의 힘이 엄청나구나'라고 새삼 깨달으면서 그때부터는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전부 취재했어요. 그동안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봤어요. 우리나라 최고 제비도 만나보고, 최고 도둑놈도 만나보고...


어떤 놈은 저한테 칼침 놓으려고 화실까지 온 적도 있었는데요. 그렇게 위험한 순간이 종종 있긴 했어도 작품을 위해서 열심히 취재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김성모 작가의 대표작 <대털>

Q. <용주골>이 잘되고 나서는 상황이 어땠나요?


<용주골>이 터지니까 일간 스포츠에서 연락이 왔어요. 다른 매체한테 많이 밀리고 있으니까 한번 들어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그때 지인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는데요. 그 분야에서 인정하는 신세대 털이범이 있다는 거예요.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청송감호소에 있대요. 바로 청송으로 가자고 했죠.


그분을 만나서 징역 수발할 테니까 자료를 좀 달라고 했어요. 자료를 엄청 많이 줬는데, 보면서 제목을 뭐로 할지를 고민했어요. 근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야, 성모야. 대털로 해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고 여쭤보니까 "크게 턴다. 대털! 멋있잖아"라고 하셨어요. 이거다 싶었고, 바로 <대털> 작업에 들어갔어요.


<대털>이 나오고 나서 허영만 선생님의 <타짜>와 붙었는데요. 반응이 엄청났어요. <대털>로 제 팬이 된 사람이 정말 많을 거예요. 그때 제가 만화계 탑이 돼서 어디 자리 가면 알아줬어요. 만화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했죠. 그 이후로 제 작품 중 명작이 많이 쏟아졌고요.


<용주골> 다음으로 <용주골 블루스>도 있었고요. <조폭 마누라>라는 영화를 보고 '마누라만 있냐, 아가씨도 있지. 조폭 아가씨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해서 <조폭 아가씨>도 만들었어요. 그렇게 쭉쭉 내는데, 4개 타이틀이 전부 뜨면서 새로운 성인 만화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됐죠.

Q. 지금까지 극화체로 성인물을 그리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가장 중요시했던 건 눈빛이었어요. 눈빛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제가 예전에 이현세 선생님께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요. "선생님, 도대체 그 눈빛은 어디서 보고 그리신 거예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눈빛을 그리려고 구로공단, 판자촌 이런 데만 가서 삶에 찌든 사람들의 눈을 계속 봤다는 거예요. 스케치하시면서요. 그래서 그런 눈빛이 나온 거예요. 이처럼 만화라는 건 인간 본연의 어떤 좌절, 고통, 슬픔, 그리고 희망 이런 것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화 작가 김성모 인터뷰

Q. 요즘은 웹툰이 대세잖아요. 작가님도 몇 년 전부터 그 흐름을 당연히 감지하셨을 것 같은데요.


2005, 2006년에 네이버 웹툰이 슬쩍 나오면서 갈수록 기존 만화 시장이 밀리는 게 느껴졌어요. 네이버 웹툰으로 빨리 넘어갔어야 하는데, 제가 아무래도 그동안 해온 게 있었으니까 계속 하던 대로 했죠.


네이버 웹툰에서 제의가 왔을 때는 '대충해서 집어넣고 넘어가자' 이런 마음으로 <돌아온 럭키짱>을 만들어서 집어넣었는데요. 나중 되어서 보니까 그러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제 웹툰에 전념해야겠다 싶어서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딱 보니까 강한 스타일의 작품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런데 제 그림의 마스크가 옛날 스타일이 되어가더라고요. 시대의 흐름은 피할 수 없었어요. 새롭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교생활기록부>라는 나름대로 새로운 것을 2017년부터 기획해서 2018년에 내놨죠.


문제는 그게 다들 아시다시피 트레이싱 논란으로 무너졌고요. 트레이싱 관련해서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상당히 힘들었어요. 겉으로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지만요.

만화 작가 김성모

Q. 아예 작가님의 만화를 볼 수 있는 자체 앱을 만들기까지 하셨잖아요.


레진코믹스, 투믹스, 탑툰이 나오기 전에 김성모 앱을 먼저 냈어요. 반응이 좋았어요. 앱을 낼 때만 해도 만화는 공짜로 보는 거지, 과금 모델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는 풍조가 팽배했는데요. 그 흐름을 깨겠다고 해서 김성모 앱을 냈던 거고, 거기서 한 달에 2,000~3,000만 원씩 수익이 났어요.


그때부터 저는 '내 작품으로만 라인업을 꾸리면 한계가 분명하니까 잡지처럼 작가들을 모아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 앱을 지금까지 제대로 운영했으면 아마 레진코믹스, 투믹스, 탑툰 위에 서 있을 텐데... 신문 연재 2개에 단행본을 10권 낼 때라서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쉽죠.

만화 작가 김성모 인터뷰

Q. 논란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신작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하시는 작가님의 마인드셋을 표현하자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일반적인 작가들이 겪지 못 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잖아요. 끝까지도 올라가 보고, 바닥까지도 추락해 보고요. 나이는 있지만, 의지와 근성만 잃지 않는다면 다시 올라갈 기회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지금은 무너지고 나서 다시 한번 도약해보고 싶어서 열심히 하고 있는 상태고요.


일본의 경우에는 작가가 가장 무르익었을 때가 40, 50대라고 하는데요. 그때가 인간을 더 잘 알게 되는 나이니까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50대 작가가 거의 없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우리 또래 작가들이 더 노력해야 하고, 새롭게 만화 시장을 이끌어주는 그림체나 스토리를 발굴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한 70살까지는 만화 그려야죠.


인간은 도전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한 군데에서 성과를 내면 머무르기 마련이잖아요. 지금도 작품 하나 내면 10년, 20년 그냥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신작을 내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열망이 있거든요. 도전이 즐겁고요. 호기심이 많으니까 한 번씩 해봐요. 그러면서 또 얻는 게 많아요.


그로써 김성모라는 브랜드가 죽지 않는 것이 작품 하나하나가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모든 게 다 죽지 않으려는 저의 몸부림이죠.

만화 작가 김성모

Q.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아 지금까지 만화 작가로서 수없이 많은 시도와 변화를 해내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저는 한 번도 도전을 겁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한테 배운 건데,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예전에 "인간은 다 똑같다. 돈 있는 놈, 싸움 잘하는 놈이든 간에 인간은 똑같고, 어느 분야이든 간에 그건 다 인간이 하는 거다"라고 하셨거든요. 저도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보통 가질 법한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에 막연한 두려움이 없어요. 오히려 즐겼어요. 보물섬에 처음 연재 들어갈 때부터 신인 작가인데도 "제가 30살 안에 벤츠 사고, 빌딩 하나 짓겠습니다. 저 밀어주세요"라고 했어요. 신진 작가가 그러니까 얼마나 버릇없어 보였겠어요.


근데 정말 해냈어요. 30살 되기 전, 27살에 벤츠 사고 빌딩 하나 지었어요. 20대 때 이미 다 이룬 거예요. 그럴 수 있었던 건 겁 없음도 있지만, 에너지가 많아서 한 번 뭘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붙들고 있는 집요함 때문이기도 해요. 이렇게 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촉이 항상 있어서 끝까지 달라붙은 적이 많았던 거 같아요.

만화 작가 김성모와 그의 친구들

Q. 비슷한 질문일 수 있는데, 김성모라는 만화 작가 지금에 오기까지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는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친구들이에요. 혼자서는 이 모든 걸 못했을 테니까요. 저는 친구들한테 한 번도 노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사람이 그래요. 말로만 따라오라고 하면 잘 안 돼요. 돈을 줘도 잘 안 되고요. 대신 세상에 완전히 짓밟혀서 서로 껴안고 엉엉 울면서 '야, 우리 한번 해보자' 하면서 가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런 관계가 진짜라고 봐요.


사실 제 작가 인생을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어요. 예전부터 제가 꼬셔서 데려온 친구들이 한 10여 명 되는데요. 그 친구들이 저랑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그중에서 지금도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대여섯 명 돼요. 제가 꾸준히 작품 기획을 해야 제 팀이 먹고살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동안 열심히 뛰었던 거 같아요. 계속 작품을 구상해야 또 히트를 하고, 일거리를 줄 거 아니에요. 그저 아까 말한 것처럼 '한번 잘돼 보자. 만화 그려서 우리 팀 잘 먹고 잘 살아서 끝까지 가보자' 이것뿐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되게 부러워하는 부분이 뭐냐면요. 28년 전에 저랑 같이 시작한 친구 3명이 있었는데요. 그중 1명은 눈이 좀 안 좋아서 나갔지만, 2명은 아직도 있어요. 같이 있던 후배들 5명도 다 있고요.


서로 간의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인간은 이해타산적으로 언젠가는 배신하게 되어 있거든요. 자기가 더 크게 하기 위해 나간다든지, 뭐든 하게 되어 있죠. 그러지 않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함께 온 조직은 만화계에서 우리 화실이 마지막일 거예요. 그런 점들을 생각하다 보면 사나이답게 살았다고 느껴요. 


제 나이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작가가 거의 없는데요. 지금 20~30대 인기 작가들도 상당히 힘들 거예요. 보장할 수 없어요. 저처럼 30년을 같이 한 친구들과 이렇게 끝까지 간다는 것 자체로 행복한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확실히 자랑할 만하지 않나요?

* 본 아티클은 2020년 9월 공개된 <'만신' 김성모 25년 근성 일대기>의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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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편집 김정원

melo@eoeoe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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