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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 괴물 : 지금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은 행복

액괴를 만지면 세상 근심이 녹아내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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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웬티스 타임라인 작성일자2018.08.13. | 885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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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래 질투가 좀 많습니다


요즘은 김태리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OO티비에서 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때문입니다. 주인공 김태리(혜원 역)의 미모에도 샘이 났지만, 진짜 질투가 난 건 다른 이유였습니다. 김태리는 공시에 낙방한 취준생, 저는 방송사에 낙방한 취준생으로 우리의 처지는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저와 김태리 사이를 갈라놓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태리는 그녀만의 ‘리틀 포레스트’인 고향이 있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자신만의 작은 쉼터를 의미합니다. 온갖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쉴 수 있는 곳. 전 김태리처럼 돌아갈 곳도, 다른 ‘리틀 포레스트’도 없었습니다.

“취미가 뭐예요?”


면접에서 받은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날카로운 분석력을 요구하지도, 깊은 전문 지식을 바라지도 않는 질문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요. 우왕좌왕 대답은 하고 넘어갔지만 그 뒤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넌 왜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흔한 취미 하나 갖질 못했니?’

무지 툭툭

십자수, 그림 그리기, 덕질 하기 유치원생을 거처 고등학생 때까지 끝없는 취미를 갖고 있었지만, 스무 살이 되고 제 취미 리스트는 뚝 끊겼습니다. 답은 뻔하디 뻔했습니다. 돈과 시간 그리고 현생 덕에 취미를 가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각박한 현실 속, 취미 하나 없다 보니 더욱더 하루하루가 퍽퍽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나쁜 건 나 혼자만 불행하기는 싫어 ‘내일 지구 멸망’이 소망인 심성 꼬인 취준생이 돼버렸습니다.

으아아아 스트레스 오조오억개!!!

물론 취미 하나 없는 재미없는 삶이 온전히 제 잘못은 아닐 겁니다. 공공기관이 신입사원 전체를 청탁으로 채용하고, 제1금융권 은행들은 면접 점수를 조작하는 세상에서, 빽도 뛰어난 학벌도 없는 저는 쉴 틈 없이 이 악물고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니 취준 생활도 제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오롯이 취업을 위해 버려야 하는 시간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소중한 인생의 일부였습니다. 나만의 ‘리를 포레스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어차피 고통의 연속인 인생, 소소한 재미라도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곰곰이 고민한 결과 저의 ‘리틀 포레스트’의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뿌듯

1. 돈과 시간이 많이 들지 않을 것

2. 일주일에 1회 정도 실천 가능할 것

3. 현생을 잊을 수 있을 만큼 나를 기쁘게 할 것


다양한 ‘리틀 포레스트’ 후보들을 경험하고 제 ‘리틀 포레스트’로 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기준을 정했습니다.


1. 재미

2. 지속성

3. 가성비


이 세 가지 평가 기준의 점수를 합산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취미를 제 ‘리틀 포레스트’로 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출처 : @kaboompics

아까워서 바라만 보던 그 이름, 액체괴물


제 첫 번째 ‘리틀 포레스트’ 후보는 바로 슬라임입니다.


슬라임은 2년 전부터 푹 빠져있는 놀잇감(?)이었습니다. 액체괴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주로 물풀로 만든 말캉말캉한 장난감을 말합니다. 2년 전 우연히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슬라임을 접하게 된 후, 자기 전 1시간씩은 슬라임 영상을 볼 정도로 푹 빠져버렸습니다.

영상을 볼 때마다 직접 만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실 슬라임은 실용성 제로에 수렴하는 물건으로 정말 쓸데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손으로 주무르고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죠.


용돈을 받으며 취준 생활을 하고 있는 제가 슬라임까지 사기에는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저 남이 갖고 노는 영상을 하염없이 볼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리틀 포레스트’를 찾기로 결심했으니, 제 행복을 위해서 한번 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쓸모없는 소비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냐고요?


아니요. 슬라임을 구매하는 과정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 가지 업체에서 다양한 슬라임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슬라임을 살까 고민하는 것조차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쇼핑몰 속 슬라임을 보며 이 슬라임은 어떤 촉감일까 상상하며 밤을 새 슬라임 3개를 골랐습니다. 총 26500원이 들었습니다.


사실 사면서도 하나만 살까, 이걸 사는 게 맞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치킨 값은 아낌없이 쓰는 제 모습을 떠올리곤, ‘치킨 한번 덜 먹는 셈 치고 사자’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고르는 것조차 이렇게 재밌다니! 만지면 도대체 얼마나 기분이 좋다는 걸까! 택배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택배가 좋아

드디어 저의 아가들이 도착했습니다. 

경건하게 손을 비누로 뽀득뽀득 닦아내고 

개봉을 시작했습니다. 

슬라임은 먼지가 잘 묻기 때문에 

만지기 전 손 세척은 기본입니다.

첫째 아가는 살구 슬라임입니다. 베이스 슬라임과 주황색 클레이가 섞여 있는 슬라임으로 버터 슬라임이라고 불리는 종류입니다. 이 아이를 두 손 가득 주무르고 있자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구름을 만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보들보들 뭉실뭉실한 촉감이 두 손을 가득 채웁니다.


둘째 아가는 우유 크림 슬라임입니다. 굉장히 베이식한 슬라임에 해당하는 아가로 정말 애기 궁둥이처럼 부드럽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건 이 아가에게서 달달한 연유 향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콧구멍까지 벌렁거리게 만드는 요물 같은 슬라임입니다. 어찌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셋째 아가는 하리보 피쉬볼 슬라임입니다. 동그란 구슬과 하리보 모양의 플라스틱이 들어가 있는 아가로 보다 크런키 한 강한 자극을 줍니다. 아가를 만질 때 나는 바스락바스락 소리도 큰 재미입니다

슬라임을 만지면 세상 근심이 녹아내립니다.


오감이 오직 손에만 집중되면서 마음에 강 같은 평과가 찾아옵니다. 멍을 때리며 슬라임을 만지다 보면 한 시간 정도는 훌쩍 보내게 됩니다. 현생을 잊어버리기엔 최고의 물건임이 틀림없습니다. 특히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한 자소서나 글을 쓸 때 슬라임을 만지고 있으면, 스트레스는 덜고 뿜뿜한 창의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슬라임의 촉감은 처음과 매우 달라집니다. 2주 주기로 새로 사야만 하죠. 슬라임 한 개당 6000-7000원 정도 하고 택배비까지 하면 한 개당 10000원 정도 지출하게 됩니다. 주문 한 번에 한 개만 사기에는 많이 아쉬우니 보통 3개 정도 주문하게 됩니다. 즉 한 달에 5만 원 정도 지출하게 되죠.

또 만지다 보면 현타가 옵니다. 슬라임을 좋아하는 사람조차 ‘이걸 왜 갖고 놀지?’라는 생각이 불쑥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만지게 됩니다. 이거, 꽤나 큰 정서적인 안정감을 선사해줍니다.


이제 책상에는 언제나 슬라임이 준비되어 있고, 어느새 손에 슬라임을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기 때문에, 자주 사진 못해도 하나씩은 꼭 구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 떨어진 행복보다 제 손에 꽉 들어오는 이 행복. 어쩐지 제 '리틀 포레스트'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1. 재미 ★★★★☆

2. 지속성 ★★★☆☆

3. 가성비 ★★★☆☆

치어리더

다음 화 예고 : 점심시간은 늘 혼자입니다.


부모님은 일을 가시고 동생들은 학교에 갑니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저 혼자서 집을 하루종일 지키고 있습니다. 주인이 일을 나가고 집에 홀로 남겨진 애완동물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동안 부엌은 내 것이 아닌가? 

출처 : @Daria-Yakovl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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