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던 스티브 아오키의 아버지
[1분안에 넷플읽기]
스티브를 다른 DJ들과 비교할 순 없죠. 독특한 역할이 있어요. (티에스토, 프로듀서)
DJ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첫 연예인 중 하나예요. (아프로잭, 프로듀서)
"댄스 음악은 사실 개성이 없잖아요. 스티브는 개성이 차고 넘치죠. 스티브를 개인적으로 모르더라도 바로 강한 인상을 받게 돼요."(디플로, 프로듀서)
"자라면서 전 늘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었어요. 성공할 거라는 걸 어떻게 보여드릴까? " (스티브 아오키)
스티브 아오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스티브는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항상 새로운 일에 빠져 바빴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건 1년에 한 두 번이었다. 그때마다 스티브는 늘 들떠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다.
미국 최대 일본 레스토랑 체인 베니하나의 창업자.
명예의 전당 헌액 레슬러.
오프쇼어 보트 경주 챔피언.
백개먼 대회 세계 챔피언.
스티브 아오키의 아버지 히로아키 아오키는 미국에서 '록키 아오키'로 불렸다. 그의 이력을 나열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레슬링 선수로 미국 뉴욕에 왔던 그는 미국에 남아 자신만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친듯이 일했다.
그렇게 일본식 철판요리 식당인 베니하나를 오픈한 록키 아오키는 몇 년 후 미국 전역에, 전 세계에 지점을 내게 됐다.
그는 사업가이자 스포츠맨이었다. 레슬링 외에도 열기구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하고, 요트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사업가로도, 스포츠맨으로도 성공한 록키 아오키는 존 레논,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유명인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도 그들 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자신의 일이 최우선이었고, 가족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럼에도 스티브에게 아버지는 슈퍼히어로였다. 아버지는 모두가 무모하다는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인정받고 싶어했다.
"스티브는 아버지를 숭배했어요. 오빠나 언니들이 다 그랬죠." (데본 아오키, 여동생, 슈퍼모델)
일에 미친 사람이었던 아버지처럼 스티브 아오키도 일에 미친 삶을 살았다.
하드코어 록에 빠져있었던 그는 겨우 19살의 나이에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했다. 산타바바라에서 출발한 그의 레이블 딤 막(DIM MAK)이다.
22살에 딤막을 키우기 위해 LA로 온 스티브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허름한 집을 얻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지원은 받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의 계획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아버지에게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고군분투했다.
하드코어 록을 했던 스티브 아오키는 LA에서 처음으로 디제잉을 배우게 됐다. 그의 공연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EDM 공연이지만 마치 록 공연처럼 그는 무대를 누볐다. 마치 록스타처럼 객석에 뛰어들고 술을 뿌렸다. 마이크를 들고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허리 높이 만큼 점프하기도 했다.
"스티브는 대단해요. 그게 그를 돋보이게 하죠. 호들갑 떠는 성격이요. 모두 의문을 품고 있죠. '앞으로 어떻게 되지?' 전 쇼가 점점 더 진화해서 캐릭터와 개성이 더 중요해질 거라 봅니다. 스티브는 늘 DJ 이상이었어요." (피트 통, 라디오 진행자)
"전 10년 넘게 스티브의 매니저였어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시작한지 2년 쯤 됐을 때 남들이 스티브한테 일을 좀 줄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계속 못 한다고요. 1,2년 만에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고요. 지금이 8,9년 후인데 스티브는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해왔어요." (맷 콜론, 스티브 아오키의 매니저)
스티브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려했다. 미국, 유럽, 아시아 어느 곳이든.
그는 비행거리로 세계에서 제일 여행을 많이 한 뮤지션으로 기네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여기 계셨으면 저를 정말 자랑스러워 하셨을 거예요. 아들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연주를 하니까요." (스티브 아오키,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앞둔 기자회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