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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버지의 원죄를 고발해야 한다

조회수 2018. 5. 18. 17: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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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에게 보내는 편지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씨, 


소셜 미디어 활동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십여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2004년에 85년생이었으니, 당시 10대 후반인 그녀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비통 건물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덧붙였습니다.


"...정말 또 느낀다. 우리나라가 젤 구리다...bb


프랑스에 있는 루이뷔통 건물이랜다....정말...너무 멋있지 않나?


우리 나라는 성냥갑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그런 것만 지어 놓고. 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정말 공부 열씨미 해서 이런 데 좀 투자하자. 아무 생각이 없는 세상 같다."


대한민국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였다면 그냥 "철딱서니 없기는...쯧쯧..." 정도의 지청구 한 마디로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소녀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12세 때 이미 자신의 명의로 된 땅 330㎡(100평)을 소유했고, 그 뒤로도 많은 재산을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까요. 더구나 소녀의 조부모와 부모가 그녀에게 물려준 재산은 자금의 출처가 투명하지 않아 여러 추측과 의심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던 참이었습니다. 


바로 전재국씨 당신의 딸, 전수현 씨 이야기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혹시 <뮤직 박스>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신지요? 유능한 변호사 앤 탤버트와 그녀의 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헝가리 이민자 출신인 앤의 아버지는 어느 날 미국 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앤의 아버지가 나치의 특수 경찰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사실을 숨기고 미국에 들어온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를 추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직접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나섭니다. 앤에게 아버지는 자신과 남동생을 위해 평생 헌신적으로 살아왔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출처: 영화 <뮤직 박스>
출처: 영화 <뮤직 박스>

아버지가 모함을 당하고 있는 거로 생각한 그녀는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 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해결됐다고 생각한 그녀 앞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친구가 죽기 전 남겼다는 작은 뮤직 박스가 앤에게 전달되고, 그녀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몇 장의 사진을 봅니다. 거기엔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학살하던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생각이 오갔을 시간을 뒤로 한채 그녀는 자신과 싸웠던 검사에게 편지를 부칩니다. 그 사진과 함께요. 

출처: 영화 <뮤직 박스>
출처: 영화 <뮤직 박스>

검사에게 편지를 쓰던 앤의 모습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출간된 전재국씨 당신 아버지의 자서전 소식을 듣고 난 뒤였습니다. 그 책을 세상에 내놓은 곳이 당신이 운영하는 출판사라는 걸 알고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소극적 지지를 표명한 셈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발 더 나아가 그의 변명을 받아 적어 세상에 보란 듯이 내놓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사실로 이미 알려진 일마저 심각하게 왜곡하고, 수많은 사람을 한 번 더 잔인하게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당신과 당신 아버지에게서 초조함이 느껴진다고요. 당신들의 후손들이 당신 아버지가 저지른 죄로 인해 어떤 곤란도 겪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고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거지요. 


근래 들어 더욱 자신의 죄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당신의 아버지를 보면 당신들 옆엔 "정권도 바뀐 마당에 이런 전략이 통할 리 없다"는 진언을 해 줄 측근도 없는 것 같습니다. 광주를 다룬 영화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당신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맑은 정신으로 그가 법정에 다시 서기를 바라는 제 바람이 이뤄지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영화 속 앤과 같이 결단을 내리는 일 같은 건, 아버지의 불법 비자금으로 평생 호화롭게 살아온 당신에게 바라기는 아마도 힘든 일이겠지요. 다만, 당신들을 위해 제가 아는 몇 가지 팁을 알려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아버지를 고발한 앤은 영화 속 주인공이기만 할까요. 사실 영화를 만든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 부역자라는 걸 알고 난 후, 아버지와 의절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영화로 만든 겁니다. 


아버지가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봉사 활동으로 아버지의 죄를 대신 갚으며 살다 간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도 해 드리고 싶군요. 그녀가 스타 덤에 오르고 난 뒤 영화 <안네의 일기> 캐스팅을 거절한 이야기는 인간의 염치에 관한 작은 예로 덧붙여서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헵번의 아들과 손녀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저는 참회의 방법을, 죄를 용서받는 길이 어때야 하는가를 봅니다.

출처: 연합뉴스
전재국의 땅 연천 '허브빌리지'.

2004년, 미성년이던 당신의 딸 전수현씨 명의로 경기도에 위치한 5200㎡(약 1573평) 규모의 허브 농장을 산 뒤 당신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제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땅 100평을 팔아 이곳의 땅을 사 줬다.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그 땅과 그 땅 위에 심은 생명들을 소중히 가꾸라고 했다..."


아마도 당신이 사들인 허브 농장에서는 지금도 많은 풀이 소중하게 가꿔지고 있을 겁니다. 저는 땅 위의 풀 한 포기도 소중하게 여기는 당신이 더 늦기 전에 공수 부대 총칼에 죽어간 그 수 많은 '생명'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생명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참회 없이, 함부로 '생명'을 논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이제 성년이 된 당신의 딸이 "열씨미 공부를 해서" 어떤 것에 "투자를" 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한 나라가 구린지, 구리지 않은 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준이 도시 한 복판에 세워진 근사한 건물 따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그녀가 알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출처: 영화 <뮤직 박스>

* 외부 필진 김지혜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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