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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 정신적 학대, 우리의 기억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조회수 2018. 5. 12.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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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거 가정폭력이야"

따뜻한, 부드러운, 안심이 되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우리는 낯선 폭력의 모습을 본다. 폭력은 때때로 혹은 자주 일어나기도 하며, 어떤 집에서는 날선 말들로 또 어떤 집에서는 퍼런 멍자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너무나 다양하고 ‘사적이어서’ 폭력이라고 불리지 못했던 우리의 경험들을 돌아본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부모님이 조금 고압적이었다는 것 정도. 이를테면 7살 때쯤 일이 그랬다. 어머니는 철물점 한편에 놓인 철대를 들고, 나를 포함한 삼남매를 쭉 세운 적이 있다. 우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걸로 한 명씩 때리겠다고. 아주 크고 무거워 보였던 그 철대는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위협적인 ‘매’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농담으로 “반 죽는다”는 말을 막 배우던 때였는데, 저걸 맞으면 정말로 반 죽는 상황이라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 더욱이 어머니는 일부로 인적이 적은 곳에 우리를 세웠고, 그곳에선 누구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아마도 3살, 7살, 11살. 어쩌면 그건 생명의 위협이었다.






더 위협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 날 정말로 반 죽더라도, 계속 그 집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철물점 옆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7살의 나는 ‘떨었다’라는 표현으론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떨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집에 가서는 엄마 말을 정말 잘 들어야겠다고. 맞지 않기 위해서, 아니 살기 위해서라도. 커가면서 그와 비슷한 상황은 몇 번 더 있었고, 나는 이제 그 시간들을 두고서 뭐라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분명한 것은 그런 시간들을 겨우 견뎌냈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살아남은 것에 가깝다고도 생각한다. 지금, 그것을 ‘감히’ 가정폭력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정말 피해자일까






나는 정말 피해자일까. 이 물음 앞에 자신이 없다. 우리 집은 ‘가정 폭력’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드라마에서 가정 폭력의 모습은 정해져 있었다. 직업이 없고,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엔 소주잔을 들고, 꼭 뺨을 때리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 같은 것.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그의 그림자가 ‘무서운 늑대’로 변한다는 비유도 자주 등장하곤 했다. 가정폭력은 부모님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거나, 알코올 중독이거나, 돈이 없거나, 아예 사람이 아니거나 해서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겪은 폭력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내게 흉터를 남긴 장면은 드라마처럼 깨진 소주병으로 폭행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들었던 철물점의 그 거대한 철대도 아니었다. 가장 상흔이 남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외상을 남기지 않는 폭력이었다.

ⓒ우현, 다음 웹툰 ‘두 번째 집’ 캡쳐

빌고, 또 빌어야 했던 십 대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걸친 학교폭력 속에서 부모님에게 빌어야 했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구해달라고. 그 폭력들 속에 ‘정신병자’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고. 전학이나 자퇴를 시켜달라고 수없이 빌었지만, 부모님이 나를 외면하는 말은 간단했다. “네가 반항적이라 그래”. 그렇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학교에 매일 폭력을 당하러 가는 시간을 혼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정작 부모님은 나를 구해주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어떤 것도 ‘부모님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절박한 마음으로 정신병원에라도 보내달라는 말도 부모님은 간단히 기각하곤 했다. 제발, 또 제발.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부모님에게선 “이제 그만”이라는 말 말곤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겐 정신과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없어, 비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가능했다. 지역 보건소를 찾아, ‘성인 자격’으로 조금의 보조금을 받아서였다. 물론, 모든 증상은 더없이 악화된 이후였다. 병원에 처음 간 날, 부모님은 내게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했다. 그것은 ‘벌’이라고.




그 날,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말 중에 내가 기억하는 말은 두 문장이었다. “더 이상 발악하지 마”, “쇼하지 마”.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서늘하다 못해, 삶을 그만두고 싶어진다.









"응, 그거 가정폭력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아침밥은 꼭 챙겨야 마음이 놓인다는 엄마, 우리를 잘 살게 해주려면 열심히 일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하는 아빠. 조금 빠듯하지만, 자식에게 헌신하는 그런 부모. 우리 집은 드라마에 평범한 가정으로 나올 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내게 말하길, 그 폭력들은 ‘좋은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교육적인 목적으로 호되게 ‘가르치면’ 애한테 더 좋을 것 같았다고. 그러면 안 되는 줄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부모는 애를 정신병원에 데려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고. 그 속에서 나는 스스로가 정말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지 의심하곤 했다. 가정 폭력을 말하는 공익광고에서 아이가 폭행당하는 모습이 부각되는 것과 달리, 내가 괴로워했던 장면은 ‘덜 폭력적인 것’이라고 치부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겪은 고통의 경험은 “교육에 서툰 부모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 속에 합리화되곤 했다.



ⓒ우현, 다음 웹툰 ‘두 번째 집’ 캡쳐

하지만 친구들이 “나도 그랬는데”라며 하나둘 풀어놓는 경험을 듣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가르치기 위해서”와 “잘 몰라서” 이 문장이 실은 내 부모님만의 언어가 아니라, 가정 폭력을 합리화하는 전형적인 말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드라마 속 ‘나쁜 아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폭력은 ‘술을 마시고 잠깐 정신이 돌아서’라며,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일탈적인 폭력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 속에서 집요하게 나타나는 일에 가까웠다. 집의 소중함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아빠와, 성소수자임을 밝히는 글을 몰래 보고는 가족 전부에게 말하겠다고 선포하는 엄마의 협박, 아들인 동생에게만 용돈을 후하게 주면서 딸인 자신은 사치스럽다고 내몰았다는 나와 내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사소한’ 폭력 속에서, “한국 부모들은 다 그래”라고 가볍게 넘어가는 사건들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너무나 괴로워, 집과 관련한 주제가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화두를 잡아채며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곤 했다. 그렇게 가정에서의 폭력이 나만의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또 내 친구의 경험에서 그와 비슷한 나를 발견하면서, 더 이상 그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서야 이름 붙여지지 못한 기억 앞에 ‘가정 폭력’이라는 단어를 비로소 꺼낼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그건 가정폭력일까?”라며, 나와 내 친구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의심하면서, 서로에게 질문해왔던 것에서, 이런 답을 해낼 수 있었다. “응, 그거 가정폭력이야”라고. 그렇게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켰다’. 가족에게 전부 다 말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엄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렇게 부끄러운 걸 왜 하냐”며 두려움과 착잡함이 섞인 표정을 짓는 그 사람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해석되지 않는 질문을 마주한다. 그 또한 가부장제의 큰 피해자라는 것을, 성소수자인 나를 향한 폭력들은 ‘정상 가족’을 지키리라는 엄마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분노와 연민 사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는 채로 나는 남아있다. 그래서 이따금 순수한 피해자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온전한 피해자, 그는 완전한 가해자인 구도 속에서 선인과 악인이 나뉘어, 그저 엄마를 미워하기만 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페미니즘이 가져다주는 질문의 답답함은 제쳐두고, “나는 피해자니까, 나는 피해자니까”를 마음속에 외우며, 가해자였던 그에게 무작정 큰소리를 치며 화를 풀고 싶어지기도 한다.

ⓒ우현, 다음 웹툰 ‘두 번째 집’ 캡쳐

그럼에도 한편으로 당황하면서 알아차리곤 한다. 피해자로서 폭력을 합리화하려는 말들 속에 내가 괴로웠던 만큼, 동시에 그 피해자의 감각으로 이것은 또 다른 합리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글은 혼란스러운 다짐이기도 하다. 나 또한 가해할 수 있는 존재로서, 계속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끝에 고민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 가해자라는 이름의 ‘절대 악’을 상정하는 것보다, 그를 만든 구조와 싸우겠다는 다짐.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구조의 피해자임을 잊지 않으며, 오롯이 그 고민과 질문을 마주해내고 싶다는 다짐 말이다.





그런 다짐을 하는 이유는 사실 스스로를 위해서다. 내가 겪은 폭력의 구조를 오롯이 응시해내며, 보다 정확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십 대의 나에게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과거의 나를 연민한 끝에, 피해자이면서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남고 싶어졌다. 그래서 계속 혼란스러운 피해자이고 싶어졌다.






대신 무작정 모두를 용서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지금 용서할 수 있는 만큼만 용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가정 폭력’은 ‘가정 폭력’이라고 부르면서, 내 피해를 오롯이 응시하고 싶다. 스스로를 충분히 연민해내는 것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십 대의 내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그 모든 시간을 거쳐, 이제는 폭력을 반복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려고 한다는 뒤늦은 편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나와 비슷한 폭력을 겪고 있을 사람들에게, 의심에 의심을 반복하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다시금 이렇게 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 그거 가정폭력이야”라고. 마침내 그 고민을 마치면서, 그리고 또 혼란스러운 고민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렇게 계속 언어를 찾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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