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다시 교단에 서는 상상을 한다

조회수 2018. 4. 25. 15: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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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퇴직 교사가 된 지 3년이 지났다.
▲ 눈 내리는 아침,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아이들(2011년 2월). 이듬해 나는 이 학교를 떠났다.

5~6년 전 퇴직한 내 친구는 명예퇴직한 교사가 기간제 교사로 학교로 돌아오는 걸 특유의 독설로 비난하곤 한다. 제 뜻으로 떠난 사람이 왜 다시 돌아와 젊은이들 일자리를 빼앗는가 하고 말이다. 동감이다. 같은 조건으로 젊은이와 경쟁하는 경우에 경력 교사가 뽑히리라는 건 물으나마나기 때문이다.


학교를 떠나면서 내가 다시 교단으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였다. 교원 자격을 갖고 있지만 임용되지 못한 예비교사 자원은 넘친다. 그러나 이들을 잘 구할 수 없게 되는 때도 있기는 하다. 임용시험이 가까워지면 넘치던 이 자원이 갑작스레 고갈되는 것이다.

기다렸지만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부득이하게 잠깐 교단으로 돌아온 이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이들은 비난할 수 없다. 교사의 빈자리를 채울 기간제 교사를 구하지 못하면 피해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가 젊은이들의 몫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교단에 다시 설 기회다.


학교를 떠나면서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그런 기회가 내게도 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거두지 않았다. 이를테면 예기치 않은 일로 자리를 비우는 교사가 신청하는 ‘강사’ 자리가 내게 올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 말이다.


물론, 가외 수입이 아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수업을 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나 1년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지났고 다시 한 해가 무심히 흘러갔다. 그리고 내게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맞아! 굳이 사람이 필요하다면 더 젊고 힘 좋은 친구들이 있을 텐데, 기운 빠져가는 늙다릴 부를 일은 없지. 나는 헛헛하지만 기대를 접었다.


시내의 도립 도서관에 글쓰기 강좌를 신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하다가 말았다. 강좌를 연다 해도 이른바 첨삭지도로 빼앗길 시간이 두려웠고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늘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지난 교단생활은 까마득한 시간 저편의 일처럼 현실감 없이 느껴지곤 한다. 길거리에서 더벅머리 사내아이들이나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자아이들을 만나도 마음은 심상하기만 하다. 해직 시절엔 아이들이 날 무심히 스쳐 가는 것에도 마음을 다치곤 했는데 말이다.


오늘은 예전 글을 찾느라고 블로그를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10여 년 전, 여학교에 있을 때 쓴 아이들 이야기를 읽게 됐다. 담임을 맡았고 아이들과의 교감이 만족스러웠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유독 학교와 아이들 이야기를 꽤 많이 쓰게 된 건 그래서다.

▲ 안개가 자욱한 아침,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하는 아이(2008년 11월)

2009년, 내리 세 해째 담임을 맡던 때였는데 나는 그게 마지막 담임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제목을 “지금 우린 서로에게 잘 ‘길들여지고’ 있다”고 썼다. 9년 전의 글인데, 이중 피동인 ‘길들여지다’를 쓰는 실수를 했다. (‘길들다’가 자동사여서 타동사 ‘길들이다’를 다시 피동형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관련 글: 지금 우린 서로에게 잘 ‘길들여지고’ 있다)


3월 말인데도 나는 아이들이 내게 잘 ‘길들여지고’ 있다고 썼다. 선발시험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은 말썽도 부리지 않았고 교사와 학교에 순종적이었다.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걸 나는 길들고 있다고 쓴 것이다.


글을 한 자 한 자 뜯어 읽는데 마음이 애틋해졌다. 자연스레 그 무렵에 쓴 글들을 이것저것 뒤적이게 됐다. 애틋해지는 마음은 같은 해 늦가을, 교과서를 펴다가 그 전해에 누군가가 주어서 책갈피에 넣어둔 네잎클로버 얘기를 다룬 글을 읽으면서 더 짙어졌다. (관련 글: 지난해의 네잎클로버)


애틋해지는 마음 한편으로 10년 안쪽의 일인데도 그것은 마치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 나는 그걸 전해 준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난 까맣게 잊었지만 그 아이는 문학 교사에게 전해 준 네잎클로버를 기억하고 있을까.


상념의 끝은 문득 그 시절, 내가 아이들을 귀애한 것이 어쩌면 그들의 순종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공부에는 담을 쌓은 채 말썽을 피워대고 수업에는 졸기 일쑤인 여느 학교의 아이들과 달리 그 아이들은 예의 발랐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다. 내가 아무 고민 없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의 순종적 덕성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회고로 확인하는 자신의 한계

여느 학교의 아이들에게도 이 아이들 못지않은 사랑과 너그러움을 베풀 수 있었을까. 햇병아리 교사 시절처럼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노여움과 적의로 아이들을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나는 새삼스럽게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과 무관했던 자신의 한계를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같은 해 2월에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쓴 글도 나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읽었다. 나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작별했다. “나야 그들의 삶의 한 과정을 스쳐 간 바람 같은 존재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가 내 소회였는데 그건 내 한계를 더하거나 보태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관련 글: 작별, 그렇게 아이들은 여물어 간다)


2011년에 만난 1학년이 내가 담임을 맡은 마지막 아이들이었다. 마지막 담임이란 걸 의식해서였을까, 나는 헤어지면서 드물게 아이들에게 편지도 썼다. 나는 혹시 내 말로 상처받은 아이들이 있을까 두려워 용서를 빌고, 그건 내 허물일 뿐 너희 잘못은 아니라고 썼다. (관련 글: 2월, 그리고 작별)


이듬해 나는 비담임으로 1년을 보낸 뒤 그 학교를 떠났다. 마지막 남학교에서 나는 담임을 맡지 않고 수업으로만 아이들을 만났다. 여학생과 달리 끊임없이 졸아대는 아이들과의 4년……, 지금 생각하면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도 지쳐 있었는데 정작 나는 그걸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안개 낀 아침, 새벽같이 등교하고 밤늦게야 하교하는 아이들을 연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2008년 11월)

절반의 성패, 아프지만은 않다

이 푸념의 끝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서른 해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고, 제 딴엔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지녔지만 정작 그 세월의 끝은 쓸쓸하다. 절반의 성공이든, 절반의 실패든 그걸 변명 없이 받아들이는 게 아프지만은 않으니 그걸로 만족할 일이다.


어저께 어느 남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30대 남교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실천은 이렇게 하는 거지. 교직이 샐러리맨처럼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교단에는 소박한 실천으로 자신의 삶과 아이들의 그것을 확장해 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퇴직 세 해째, 이제 기대를 접었지만, 나는 가끔 교단에 선 자신의 모습을 타인처럼 떠올린다. 자신의 열정에 취하지도 않고, 아이들에 따라 표변하지 않는, 다만 그 자리에 있는 자신과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교사의 모습은 그러나 내 한갓진 꿈에 그칠 뿐이다.


내가 마지막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은 올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시절이 하 수상한지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이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그들이 여자 아이돌을 사냥하는 방법.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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