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뷰 본문

관직 버리고 무장 항일투쟁 이끈 양기하 장군

그는 남만주 최후의 무장 항일투쟁 지도자였다.
프로필 사진
직썰 작성일자2018.02.14. | 554 읽음
댓글

양기하 장군이 일경과 만주국 군대와 교전하던 중 전사한 순국지. 중국 요녕성 관전현 하로하 진 ⓒ독립기념관

하산 양기하, 만주 관전현에서 전사 순국하다

1932년 2월 10일 랴오닝성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던 조선혁명당 소속 독립군이 일본 경찰대와 만주국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혁명당 정치부위원장 하산(荷山) 양기하(梁基瑕, 1878~1932)는 격전 끝에 수십 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그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1896~1934), 중앙집행위원장 대리 고이허(1902~1937)와 함께 남만주에서의 마지막 무장 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다. 그가 순국한 뒤 양세봉은 이태 후 밀정의 사주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됐고 일본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고이허는 1937년 총살됐다.


양기하는 충남 논산 사람이다. 아호는 하산(荷山), 기하(基河)·인원(仁元), 그리고 임창주(林昌周) 등의 이름을 썼다. 구체적 행적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는 대한제국 말기 공주 군수 등을 지낸 관리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경상도 출신의 명망 있는 유학자이면서 의병을 이끌었던 의암 유인석이 수하를 이끌고 망명해 있었다. (관련 글: 1915년 오늘-연해주 13도의군 도총재 유인석 순국하다) 양기하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의암의 수하인 박장호, 조맹선 등과 가까이 지내며 독립운동을 위한 해외 기지 설립을 꾀했다. 

대한독립단 결성한 남만주 최후의 무장 투쟁 지도자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양기하는 3월 15일 박장호·조맹선·백삼규·전덕원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단체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단은 박장호를 도총재, 백삼규를 부총재, 조맹선을 총단장으로 해 총무·재무·사법·교통·선전 등 각 부서와 남만주 각 지방에 지단(支團)을 두고 한인 자치를 시행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갔다.


하산은 대한독립단의 교통부장·선전부장을 역임하면서 국내에 독립군을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일제 군경 및 일제에 부역하는 주구(走狗)를 처단하는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단·한족회·청년단연합회 등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항일 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노력은 1920년 2월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관전현 향로구에 통일기관을 설치하는 성과로 이어졌고 하산은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해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이에 임정에서는 재만 교민 통치기관은 광복군 참리부(參理部), 군사기관은 광복군사령부, 각 지방에는 군영(軍營)을 설치케 하고 각 부서를 결정했다.

하산 등이 결성한 항일 무장투쟁단체 대한독립단 본부가 있었던 화평향 양종장촌 전경 ⓒ독립기념관

광복군 참리부장에는 조병준, 광복군사령장에는 조맹선, 6개 지방 영장에는 오동진·최시흥 등을 선임하고, 각 부서장을 임명해 이들이 군사훈련과 일제 군경·행정기관에 대한 파괴사업을 전담하도록 했다. 하산은 군사통일기관인 광복군사령부의 정보국장에 선임돼 적정(敵情)탐지와 부일배 색출사업을 벌였다.


이때 조직된 광복군은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1940)됐던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과는 다른,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됐던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통합군사기관은 임시정부 산하에 편제돼 광복군사령부로 불린 것이다.

일제와 활발한 전투를 벌인 남만주 광복군 

남만주의 광복군은 끊임없이 국내에 진입해 일본 군경과 활발한 전투를 벌였는데 1920년에만 78차례나 교전을 벌였고 56군데의 주재소를 습격했다. 또한, 20개소의 면사무소 등 일제행정기관 파괴했고 96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광복군은 1922년 재만 독립군 부대들이 대한통군부로 통합될 때 흡수됐다.


하산이 1921년 4월 임정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돼 군무와 교통분과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이러한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921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이 군비 축소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태평양회의를 열 때 임정은 이승만과 서재필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외교활동을 벌이게 했다.


이때 하산은 이 독립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8월 상해에서 홍진 등과 함께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재무간사를 맡아 우리 대표단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선전과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요녕성 신빈현에 있는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한인자치 조직 국민부 본부터 ⓒ독립기념관

11월 11일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하산은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과 신익희 등 동료 의원 25명과 함께 ‘세계의 평화, 동아(東亞)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하여 한국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해 외교 독립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태평양회의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양기하는 무장 독립투쟁만이 조국 광복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독립운동 방안임을 확인했다. 1922년 10월 상하이에서 김구, 손정도, 여운형, 김인전, 조상섭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했다.


‘모두가 노동하며 군인이 되는’ 노병일치(勞兵一致)의 독립운동단체를 지향하는 한국노병회는 ‘조국 광복에 공헌하기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함’이 목적이었다. 한국노병회는 청년들을 선발해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유학시키는 등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마련에 주력했다.


한편, 이 시기 상해 임정은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주요 국무위원의 사퇴,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부재 등으로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국민의 대표기관과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독립운동계의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요녕성 관전현에 남아 있는 양기하 장군의 조선혁명군 부대 막사터. 그는 여기서 순국했다.

이때 하산은 신익희·손정도 등과 더불어 줄곧 국민대표회 소집과 이를 통해 임정을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사이의 대립은 나날이 깊어졌다. 두 기관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 하산의 노력에도 결국 이 문제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상해에서 돌아와 다시 무장 투쟁의 길로

1923년 남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 통합기관인 대한통의부가 간부들 사이의 이념분쟁과 권력분배 등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재만 독립군의 재통합이 요구됐다. 임정은 이에 재만 독립군을 1920년 설립된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임정 직속 육군주만참의부로 개편했다.


임정의 난맥상에 실망해 만주로 이동한 양기하는 이 조직에 참여해 다시금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다. 하산은 1927년 참의부의 교육위원장 겸 제3행정구 위원장으로 선임돼 재만 교민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자치 실현에 힘썼다.


그러나 이 시기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계 상황은 1925년 중국의 동북 군벌(軍閥)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사이에 체결된 ‘삼시(三矢)협정’에 따라 악화되기 시작했다. 중일 양국은 한인 독립운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가 체포에 협력한다는 이 협정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의 존립마저 위협했다.


1927년 독립운동계 전반에 불기 시작한 민족유일당운동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육군주만참의부는 정의부와 신민부, 그 밖의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통합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와 참의부 일부 계열이 통합한 국민부(國民府)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때 하산은 국민부 지방부 집행위원 겸 중앙사판소장(中央査判所長)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조선 혁명의 최후 해결은 조선 노력대중(勞力大衆)의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일본 군대·경찰·헌병·감옥·소방대 등을 근본적으로 격파하고, 정치·경제·문화 기타 제국주의적 제(諸) 시설을 모두 파괴함에 있다. 또한, 조선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일본 제국주의의 일체 세력을 구축 박멸하는 것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 ‘조선혁명군 선언서’ 중에서 

그리고 같은 해 12월 ‘당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당치국론(以黨治國論)’에 따라 남만주 일대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결성되고 그 군사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이 편성됐다. 하산은 이들 두 조직에도 가담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갔다.


조선혁명당은 재만 교민의 자치 행정기관인 국민부, 항일 무장투쟁 등 군사적 임무를 전담하던 조선혁명군과 함께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면서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동삼성(東三省,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을 점령하고 만주 동북부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 지역의 조선혁명군 및 중국의용군 등 항일 무장단체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조선혁명군 정치부위원장 양기하 장군이 전사 순국한 중국 요녕성 관전현 하로하 진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

이에 대처하고자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국민부 간부들은 1931년 12월 신빈현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의 짐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를 탐지한 일제가 회의장을 포위 습격해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 등 주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됨으로써 당과 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하산 무명의 병사들과 함께 전사

요녕성 신빈현에 세워진 양세봉 장군 흉상

이 회의에 참석했다 탈출한 하산은 양세봉·고이허 등과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국민부의 조직 재정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하산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이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양세봉이 맡아 당·정·군의 조직을 재건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해 갔다.


1932년 2월 10일 관전현(寬甸縣), 마침내 하산 양기하와 조선혁명군 병사들은 조선총독부 초산(楚山)경찰서 경찰대와 만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장렬한 순국의 순간을 맞았다. 망명 2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광복의 날 먼데 노 투사는 그렇게 고단한 삶을 내려놓았다. 향년 54세.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하산 양기하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국내에 그를 기리는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취는 중국 요녕성 관전현 하로하 진(鎭)에 세워진 기념비뿐이다. 하산과 함께 숨져간 무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참고 자료>

-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 논산시, 독립운동가 양기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놓치지 말아야 할 태그

#한파

    많이 본 TOP3

      당신을 위한 1boon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