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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청소노동자에겐 얼굴이 없다

조회수 2018. 1. 31. 16: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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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최저임금이 얼만지는 알어?”


“… 사천 원.”


“잘 아네. 근데 그 사천 원이 당신같이 늙은 사람한테 주라고 만들어진 줄 알아?(…)”


- 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최저 임금은 노동에 대한 최소의 대가이지만, 어떤 일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박지리의 소설 <양춘단 대학 탐방기> 속 주인공 70대 여성 양춘단은 남편의 병 치료를 위해 상경한 뒤 대학에서 청소 일을 하게 된다. 대학의 작업 환경은 열악하고 그녀가 쥐게 되는 돈은 적다. 이 와중에 새로 부임한 소장은 춘단의 적은 몫마저 깎겠다고 몰아붙인다. 청소 노동자들의 반발에 소장은 최저 임금 사천 원이 “당신같이 늙은 사람”을 위한 것인 줄 아느냐고 되묻는다.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은 2018년의 시작을 알린 대학의 청소 노동자 인력 감축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의 대학이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청소 노동 인력을 줄인다면 소설 속 새로 부임한 용역 소장은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임금을 깎는다. 그런데도 소설 속 소장에게는 ‘믿을 구석’이 있다. “쌩쌩하게 젊은 사람들도 들어오려고 줄 섰으니까”라는 불안정하고 유연한 노동 시장이다. 그리고 현실의 대학은 청소 노동자들의 인력을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대체하겠다며 소설의 믿을 구석을 실현한다.


이 소설이 발간된 것은 5년 전이고 실제로 쓰인 것은 십여 년이 지났다. 2009년에 쓰였고 2014년에 발간된 이 소설에는 2000년대 초반 대학들의 청소 노동자 노동조합 설립 과정이 녹아있다. 2004년 한 대학 본부가 청소 노동자들에게 보냈던 ‘폐지도 대학의 재산이다’라는 공문 또한 소설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것이라기보다 과거와 정확하게 같은 지금이다. 다시금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사계절 ⓒ사계절출판사

춘단이 대학에 간 이유

‘찾기 위해 간다.’ ‘탐방(探訪)’은 이를 의미한다. 소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대학에 간 주인공 양춘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원래 양춘단의 시작은 탐방이 아니었다. 그녀는 찾기 위해서가 아닌 무언가를 갖기 위해 대학을 방문했다. 지위를 갖기 위해.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책을 읽는 오빠들을 바라보던 춘단이 느꼈을 감정은 ‘그들과 같아지고 싶다’였다. 춘단은 정말 대학에 가고 싶었다.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둘째 오빠는 공부하고 싶다는 춘단의 얼굴에 책을 집어 던졌다. 대학에 간, 혹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제 칠십이 된 그녀는 꿈에서 만난 부모에게 자랑스럽게 말한다.

“엄메 아베여, 춘단이 오늘 대학교 댕겨왔습니다. 무슨 대학교냐고요, 아 엄메 아베 둘 다 지 초등학교도 중간에 그만두게 하셨지 않허요. 그래서 지 혼자 힘으로 보란 듯이 대학교 갔어라.”


- 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p.5

그 때문에 모든 청소노동자가 파업을 결심할 때 춘단은 홀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파업할 시간이 없다. 업무를 중단하게 된다면 대학에 (청소하러) 다니는 일 또한 중단해야 했다. 춘단은 대학에 ‘가기’ 위해 왔다. 얼른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몰래 강의실 뒤편에 앉아 수업도 들어야 한다.

춘단이 가질 수 없었던 것들

“희미한 형체지만 분명 살아 있기는 한데 말을 걸어오지는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다들 밟고 다니니….”


- 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p.206  

하지만 그녀는 곧 대학의 어떤 것도 자신이 가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먼저, 그녀는 ‘얼굴’을 가질 수 없다. 춘단은 스스로가 “희미한 형체지만 분명 살아 있기는 한데 말을 걸어오지는 않”는 그림자와 같다고 말한다. 그림자에는 얼굴이 없다. 우리는 그림자의 형체를 보고 그것의 ‘있음’을 알지만, 그림자에 눈·코·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곳을 청소하는 노동자가 그곳에 있음을 알지만, 소설 속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의 파업은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들을 한나절 토로하는 발언에서부터 시작했다. 나에게도 얼굴이 있다고.

또한, 청소 노동자는 대학에 속할 수 없다. 청소 노동자는 대학에서 일하지만, 대학의 노동자가 아니다. 소설 바깥에서도 청소 노동자들은 대학이 아닌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한다. 그들이 수행하는 노동은 대학의 말끔함을 위한 것이지만, 대학은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자신들이 “하등 관련이 없다”고 못 박는다.


다른 한편으로 청소 노동자는 숨겨진다. 춘단이 일하던 대학에 ‘정부 사절단’이 오는 날 청소 노동자들은 “알아서 대학 곳곳에 숨어있으라”는 지령을 받는다. 소설 속 대학은 깔끔함을 위해 청소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존재는 지저분하다며 숨겨진다. 청소 노동자의 몸은 서너 평 남짓한 휴게실과 그마저도 없는 경우 계단 밑 작은 휴게공간으로 사라져야 한다. 이처럼 사회는 고령의 여성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 부른 배와 깔끔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이들의 삶은 굶주리게 한다. 정작 청소노동자의 주변은 정돈되지 못하도록 내버려 둔다. 모든 것의 민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청소는 엄마 손길이 최고”라면서 사회는 청소 노동자를 주변화한다.

지난 16일 연세대학교 본관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들 ⓒ한겨레

춘단이 찾은 것들

대학의 이름표를 갖고 싶었던 춘단은 실패했다. 그녀는 대학과 계약 관계를 가지지도 못했고 얼굴을 감춰야 했으며 결국엔 존재 자체를 숨겨야 했다. 그녀는 목표로부터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를 찾았다.


우선, 대학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 반복되는 착취들을 설명할 언어를 찾았다. 남들보다 청소를 일찍 끝냈던 그녀가 몰래 들었던 수업은 여성학이었다. 춘단이 살금살금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철저히 착취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그녀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관련지어 착취를 설명하곤 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는 것 입고 있던 옷마저도 벗겨 가져가는 것이라고. 이제 춘단은 기억 저편의 단어를 꺼내어 남편 영일에게 말한다. “아, 당신이 나를 착취했다고 안 허요. 당신 김가 집안이.”

그다음 춘단은 대학 내의 지워진 존재들을 찾게 된다. 그녀는 점심시간 옥상에서 마주친 시간강사 한도진에게 묻는다. “….여그 학생이오?”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자 춘단은 혹시 교수냐고 다시 묻는다. 춘단의 엇갈린 예측들은 대학 내에서 지워진 존재로서 시간 강사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도진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도진은 존경했던 교수와 꿈꿔왔던 대학으로부터 소외당한 시간강사다, 그는 자신의 유품인 일기를 춘단에게 남긴 채 자살한다. 그리고 춘단은 시간강사의 일기를 읽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강사의 필체를 그대로 흉내 내 쓰다 보면 때로는 이것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p.307 

춘단은 도진의 유품인 일기를 대학 곳곳에 옮겨 적는다. 과거 ‘흔적을 지우는 일’이 그녀의 몫이었다면 이제 춘단은 학교의 화장실에 도진의 흔적을 남긴다. 도진의 일기를 적는 것은 대학 속에서 지워져 가는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는 제의이자 춘단 나름의 저항 방식이다. 모두가 파업에 참가할 때 홀로 반대했던 춘단이지만, 그녀는 죽은 시간 강사의 일기 속에서 대학의 그림자인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춘단의 청소노동자 동료 ‘최궁실’은 청소 노동을 하기 전에 식당 일을 했다. 사람들의 드나듦의 흔적을 지우기 전 그녀는 배고픔의 흔적을 지웠다. 춘단과 같은 청소노동자, 시간강사 도진, 그리고 최궁실이 수행했던 노동은 오늘날 대학이 자랑하는 깨끗하고 지적이고 배부른 외양을 위해 필수인 것들이다.


소설의 제목이 ‘안착기’가 아니듯 이들은 결국엔 본인이 있었던 자리(지저분, 가난, 교양 없음)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오늘날 대학의 모습과도 공명한다. 청소 노동자 인력 감축을 최저임금 인상이 불러온 어쩔 수 없는 일이자 부수적인 피해로서 의미화하는 현실의 대학 말이다. 사회학자 바우만은 부수적 피해가 언제나 내부의 외부인, 우리 안의 외부인을 향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학 내부의 외부인들이 그곳으로부터 미끄러진 이야기에 탐방기라는 제목이 붙게 된 이유는 무얼까.

탐방기, 내 발로 나왔다

‘탐방기’라는 제목은 소설의 전반부와 상당 부분 배치된다. 이 소설의 시작은 대학을 통해 무언가를 갖고 싶던 춘단의 도전기였다. 하지만 ‘탐방기’라는 제목은 본래 그 단어가 의미하듯 춘단의 여정을 변형시킨다. 대학을 단지 무언가를 알기 위해 잠시 들린 것으로 변경시키고 대학을 떠나는 일을 예정된 이별로 만든다. 그녀에게 대학의 의미가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가슴에 남은 한도, 미련도 없구만. 대학이란 데서 뭘 가르치고 배우는지 이제 알았응께.”


- 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p.383  

깨끗하고 지적이고 배부른 것의 뒤편을 알게 된 춘단은 집으로 돌아가며 말하지 않았을까. “산골로 가는 것은 대학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대학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지적인 것과 깨끗한 것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칠십이 된 노인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위선적인 대학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큰 배움을 가지고 춘단은 대학을 떠난다.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지만, 소설을 덮은 뒤 독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퇴행한 현실의 무거움과 가벼이 여겨지는 대학의 노동뿐이다.

*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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