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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역사 공부가 필요한 이유

조회수 2018. 1. 19. 18: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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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용산 일대에 가림막 설치하자"
1월 17일 매일경제는 1면에 평창행 KTX 열차가 지나가는 용산역 일대의 낙후된 모습이 국가이미지를 훼손한다며 임시 가림막을 설치해야 한다는 기사를 배치했다.ⓒ매일경제

지난 17일 매일경제 1면에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평창행 KTX 열차가 지나는 용산역 인근의 낙후된 모습을 올림픽을 위해 방문한 외국인들이 볼까 부끄럽다는 내용이다.

“열차 창문 밖으로 무너져가는 노후 주택과 녹슨 철제지붕, 폐타이어와 쪼개진 기왓장이 그대로 보인다. 멀리 보이는 한강트럼프월드 등 고층 빌딩들과 겹쳐지면 서울은 엄청난 빈부 격차를 지닌 도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외국에 국격을 높일 올림픽이 되레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국격을 높여야 할 올림픽 개최가 철저하지 못한 준비로 자칫 국가 이미지만 떨어뜨릴 수 있는 상황이 된 셈이다”




–매일경제,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

기자는 노후주택으로 인해 국가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으니 임시 가림막이라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사를 읽으면서 기자가 ‘올림픽 난민’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72만명의 올림픽 난민이 발생했던 1988년

1987년 서울 상계동 철거 현장 사진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1988년 88올림픽을 개최했다. 1987년 올림픽을 앞두고 온 나라가 기쁨과 환호로 가득 차 있었다. 대다수 국민이 올림픽으로 들떠 있었지만 무려 72만 명의 ‘올림픽 난민’이 발생했다.


1981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독 바덴바덴에서 서울로 정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이듬해인 1983년부터 ‘전면 철거 후 주거지 개발’이라는 도시 재개발사업을 시행한다. 1983년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93개 지구(42만6490㎡)에서 강제로 도시 재개발사업이 추진됐고 72만 명의 시민이 서울을 떠나야 했다.


전두환 정권은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두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싼값에 아파트를 지어 올림픽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과 도시 영세민과 무주택자의 주거 환경 개선이었다. 하지만 재개발 사업의 수익은 대부분 건설회사와 독재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지역에 살던 도시 영세민들은 정든 터전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단 몇 분의 성화 봉송을 위한 땅굴 생활

상계동 주민들의 철거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당시 김포공항에서 강동 올림픽촌까지 연결된 강변도로 주변 판자촌은 대부분 철거됐다. 비행기 항로 상에 위치했던 신림동이나 봉천동도 철거됐다. 외국인이 비행기나 차 안에서 판자촌을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


도시 영세민들이 강력히 철거를 반대해도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을 내세우며 영세민들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외국인에게 가난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암묵적 여론은 강제 철거를 정당화하며 폭력과 진압을 허용했다.


1987년 4월 4일 상계동에 천 명이 넘는 용역과 전경들이 진입해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상계동 주민들은 명동성당 앞에 두 개의 대형 천막을 짓고 무려 300여일을 보냈다. 천막 생활을 버틸 수 없었던 일부 주민들은 부천 고강동 고속도로변 주변을 매입해 집을 지으려 했고 부천시도 이를 허가했다.


부천에 도착한 주민들은 임시 가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며칠 뒤 용역들이 들이닥쳐 가건물을 철거했다. 88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가 지나갈 때 보이는 가건물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주민들은 움막을 짓고 땅굴을 파서 겨우 생존했다. 단 몇 분의 성화 봉송을 위해 주민 수백 명이 10개월간 땅굴 생활을 했다. 부천시는 이마저도 보기 싫다면서 대로변에 높은 담을 설치했다. 철거 투쟁에 동참했던 고은태 교수는 “국가가 우리를 외국인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존재로 여긴 행위였다”라고 말했다.

1986년 매일경제 10면. 상계동 재개발사업을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화면 캡처

1986년 5월 15일 매일경제에는 ‘우리동네 새 모습’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도봉구 상계동 일대에 고층아파트가 신축되면서 신시가지가 조성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상계동 주민들이 철거로 계속 쫓겨나던 시기였다.

“평창동계올림픽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달라진 서울과 대한민국의 위상을 지구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관계기관들이 이동 경로 등을 고려해 좀 더 능동적으로 거주민들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환경 개선 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허송세월한 것이 안타깝다”




-매일경제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

개발 사업 지연으로 인해 용산역 일대가 슬럼화 된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평창올림픽을 보러 온 외국인들에게 창피해할 일은 아니다.


매일경제 기자가 주장한 가림막 설치는 88올림픽 강제 철거의 명분과 비슷하다. 독재자는 국민의 삶보다 성공한 대통령으로 포장되길 원한다. 독재자에게 올림픽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강요당한다. 하지만 지금은 1988년이 아니라 2018년이다.

* 외부 필진 '아이엠피터'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아이엠피터

가상뉴스로 미리 보는 평창 동계올림픽 시나리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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