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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발전을 위해 국가가 내 땅을 빼앗아 간다면?

구로공단 잔혹사 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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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작성일자2018.01.06. | 925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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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직썰

2017년, 구로의 밤은 환합니다. 구로디지털단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고층 빌딩이 빼곡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IT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IT 밸리’라는 영광의 칭호는 판교에 넘겨줬지만, 한때 IT산업을 견인한 메카였죠.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5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구로디지털단지도, 구로공단도 아니었던 시절이죠. 영등포구 구로동에 사는 1915년생 한동휘씨와 330명의 구로동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출처 : 직썰

1950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구로동 일대의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땅을 받았습니다. 대신 수확한 곡식 일부를 국가에 냈죠.


*농지개혁법: 1950년 3월 시행. 가구당 보유할 수 있는 농지를 제한하고, 초과한 농지는 다른 농민에게 유상 또는 무상으로 강제 분배함.


전쟁의 화마가 휩쓴 땅에서도 농민들의 삶은 굳건했습니다. 쟁이질 하고, 모종을 심고, 피를 뽑았습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공들여서 수확한 쌀과 보리는 가까운 영등포 시장으로 팔러 나가곤 했습니다.


우(牛)마차에 가득 실어 나른 농작물을 모두 팔고 주머니 두둑해진 날이면, 농민들은 눈치 볼 것 없이 앞다퉈 말했지요. “오늘 한잔하고 가자!” 평온했습니다. 1961년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요.


출처 : 직썰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수출산업 공장지대’를 조성한다며, 구로동 일대의 모든 땅은 국가 소유라고 통보했습니다.


농민들은 반발했지요. “무슨 말입니까? 이건 국가로부터 받은 땅인데요” 하지만 이들의 말은 깡그리 무시됐고, 어떤 적법한 절차 없이 박정희 정권은 구로동 30만 평을 강제로 집어삼켰습니다. 한동휘씨도 4천 평의 논밭과 대지를 빼앗겼습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한동휘씨를 비롯한 330명의 농민은 1964년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서울시청, 농림부 농지담당 공무원 등이 “1950년 농지분배는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법정 증언을 했고, 농지분배서류와 현장 검증 등을 근거로 법원은 농민들의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검찰이 이에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1968년 대법원 판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승소가 불행의 씨앗이었을까요.


출처 : 직썰

1970년 7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후덥지근한 밤이었습니다.


동휘씨의 집으로 느닷없이 사복경찰 여럿이 찾아왔습니다. “물어볼 게 있으니깐 잠시 같이 가시죠” 영문을 알 수 없었죠. “잠깐 옷 좀 갈아입고 가도 됩니까?” 잠옷 차림의 동휘씨가 물었습니다. 단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금방 끝나니 그냥 갑시다”


그가 도착한 곳은 낯선 뉴서울호텔 11층 어느 방. 동휘씨처럼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의구심 없이 경찰차에 올라탔던 구로동 주민 10여 명이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영등포 경찰서, 노량진 경찰서에서도 ‘이유 없이’ 200여 명이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영장도 없는 불법 수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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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파출소, 영등포 경찰서 그리고 뉴서울호텔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벌거벗겨진 채, 무릎을 꿇었습니다. 수사관은 발로 무릎을 수없이 내리찍었습니다. “이 새끼야, 소송 사기 친 거라고 당장 인정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슬리퍼로 뺨을 때렸습니다. 귀를 세차게 내려쳐 고막이 파열돼 청력을 잃은 이도 있었습니다.


농사밖에 모르던 순박한 사람들은 감금된 내내 벌벌 떨었습니다. 누군가는 구속영장이 떨어졌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습니다. 결국, 상당수는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 국가로부터 땅을 되찾는 소송을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끝까지 버틴 한동휘씨를 비롯한 26명은 소송사기죄와 위증 혐의로 형사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979년 대법원은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짧고도 긴 재판 진행 중, 12명의 농민이 죽었습니다. 죽은 자를 재판에 세울 수 없는 검찰은 ‘어쩔 수 없이’ 공소기각 했습니다. 담당 검사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건 잘했다. 고생했다”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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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구로의 밤은 환합니다. 공장의 열기로 가득 찬 도시 한쪽에서 어떤 이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이지 못해 한겨울에도 옷깃을 열어젖혔"습니다.


땅을 빼앗긴 채 반평생 한을 짊어졌던 60대는 “진실을 밝혀내 ‘사기꾼’이라는 내 허물을 벗겨달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기고, 동네 우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19년 전 끌려갔던 그 날처럼 러닝셔츠 차림이었습니다.


얇은 판자를 사이에 두고서 혹독한 1970년 7월을 보낸 자들만이 억울함을 토해냈습니다. 기구한 사연은 구로공단을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구로 사람들을 잊은 걸까요.


섬유를 뽑아내 미싱을 돌리고, 386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던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IT’라는 첨단산업이 들어왔습니다. 잿빛 작업복도, 매캐한 공장 굴뚝 연기도, ‘공돌이’ ‘공순이’도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신 마천루를 방불케 하는 고층 빌딩이 자리했습니다.


구로의 얼굴은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그 땅의 ‘진짜 주인’들은 여전히 ‘토지 사기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005년, 구로의 밤은 환합니다.


정확히 56년 만입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특별법을 공포하고, 진실화해위원회는 ‘구로 분배농지 소송사기 조작의혹’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3년의 조사 끝에 결정문을 내놓았습니다.


“국가가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사소송에 개입하여 공권력을 부당하게 남용한 사건이다. 농민들을 집단적으로 불법 연행해 가혹행위를 가하고, 위법하게 권리포기와 위증을 강요한 것은 형사재판상 재심 사유가 된다”


공권력의 남용과 불법 연행, 가혹행위 모두 인정됐습니다. 291명의 형사재판 재심이 시작됐고, 마침내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이 판결을 근거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2017년 11월, 대법원은 331명의 농민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을 확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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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15년생 한동휘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심 재판장에는 대신 그의 아들인 1942년생 한무섭씨가 섰습니다. 2017년 12월, 재심을 신청한 291명 중 생존자는 단 2명입니다.


비옥한 농토였던 구로동에 ‘공단’과 ‘디지털단지’가 생겨나고 사라졌던 반세기 동안 국가는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땅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형기를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구로 분배농지 소송사기 조작의혹 사건 조사보고서, 2008.


세계일보, 박정희 대통령 지시, 중정·검찰서 ‘작전’… 사기꾼 몰아 땅 몰수, 2017.02.15.


theL, '구로농지 강제수용' 피해자들 천억원대 배상 확정,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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