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과 위대한 복수

조회수 2018. 2. 10. 04: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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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자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복수한다

여기 위대한 시인이 있다.

그는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실천가였고, 문단의 큰 어른이었으며, 무엇보다 탁월한 문학적 성취로 드높은 성채를 쌓아 올린 위대한 작가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그 영광스러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대했다.

여기 추잡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알량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맘껏 실현했다. 그녀들은 심지어 공개된 공간, 가령 송년회 자리에서도 공공연하게 그의 먹잇감이 됐고, 그의 추잡한 성추행은 계속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남자의 범죄를 ‘예술가의 기행’으로 낭만화하거나 혹은 그의 안락한 그림자에 머물기 위해 눈감고 귀 닫았다. 그들 중 몇몇은 그 ‘기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까지 했다.

위대한 자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복수한다.

한 인간 안에는 위대함과 초라함이 공존한다. 하루 동안에도 그 모순이 인간이라는 껍데기 속에 부딪힌다. 하물며 수년, 수십 년의 인생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어제의 위대한 인간이 오늘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거기에서 초라했던 인간이 여기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뻔한 소리지만,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위대함과 초라함, 영광과 경멸이 한몸에 담긴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을 스스로 관찰하고, 느끼는 바로는 그렇다. 나 같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삶도 때로는 설렘과 광채로 빛나곤 하니까. 그게 인간이라는 실존의 본질, 그 이율배반이다.

물론 자아의식이 싹튼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고결한 인간도 있을 수 있고, 그 반대로 평생을 개차반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과문해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인간은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위대한 존재와 초라한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섞이고, 같은 순간 같은 공간에도 그 위대함과 초라함, 영광과 경멸의 조각은 겹치고, 얽힌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는다. 그는 자신의 늙음과 병듦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청춘의 고난과 그 치열한 결핍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취, 그 찬란한 업적이 권력이 되고, 권위가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만든다. 그 감옥 속에서 스스로 수인이 된다. 소위 ‘위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게 변절하고, 훨씬 더 쉽게 타락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창백할 만큼 차갑게 빛나던 그의 사유도 점차로 무뎌지고, 그가 세월의 공허를 지혜와 성찰로 채우지 못한다면, 그 대신 그 공허를 대신하는 것은 권력과 집착, 그리고 욕망의 관성뿐이다. 그리고 그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 성찰하지 않는 권력은, 권위는 자신을 파괴하는 가장 훌륭한 독약이 된다.

그렇게 위대했던 그가 지금 초라하고, 추잡한 그에게 복수한다. 니체는 그걸 ‘위대한 복수’라고 불렀다. 어제 드높은 권위의 상징이었던 자가 오늘 자신의 집에 갇힌 채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어제까지 자신이 군림했던 담 너머의 세계를 비굴하게 훔쳐 본다. 초라하고 비굴한 '범죄 증명'. 그 위대한 자는 자신을 위한 마지막 예의로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대신 이제 자신을 스스로 동물원의 원숭이로 만든다. 그리고 기어코 잔인하게도 어느 기자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낸다.

그 모습만큼 참담하고 초라한 모습을 나는 지금까지 별로 본 적 없다.

그 모습만큼 잔인하게 위대한 복수를 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다.


1. 최영미 시인의 ‘괴물’에 관해

이 시는 특정인을 비난하기 위한 개인의 고발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시인의 외침이다. 그렇게 그 개인적인 폭로는 단순한 폭로로 머물지 않고, 시적 형상화를 통해 결국 문학적 진실을 획득한다. ‘괴물’은 현실 속 위선의 성채를 부수는 우상 파괴의 역할, 최영미 시인이 문학의 본래적인 역할이라고 이야기한 바로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황해문화(전성원 편집장)는 시의성 있는 훌륭한 기획으로 문단의 적폐를 다시금 환기하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다. 폭로된 부조리는 씁쓸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려는 노력은 상찬해야 마땅하다.

2. 작가가 타락하면 작품도 타락하는가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권력과 인격은 대체로 반비례한다. 위대했던 인간도 대체로 나이가 들면 초라해지고, 추잡해진다. 앞서 그 이야기를 나는 길게 했다. 그래서 인간은 규율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불문율로서 윤리를 만들었고, 보이는 제도로서 성문의 법전을 만들었다.

그 제도화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초라함과 경멸의 요소를 제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인간은 결정적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그 예술은 인간을 고양하고, 인격을 드높이며, 인간이 서로에게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궁극의 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예술 작품의 위대함을 그 작품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작가의 초라함, 저열함이 결국 배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그 자식(작품)을 보는 사람들(독자)을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식은 별개의 인격이지만, 그 자식에게는 부모의 DNA가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양자는 불가분이다. 자식을 알고 싶으면 그 부모를 보라는 격언은, 작품과 작가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이라면, 도덕적으로도 체험적으로도 옳다.

위대한 작품은 스스로 열리려 하고, 그 작품을 둘러싼 세계, 그 작품을 애착하는 독자와 특히 평론가는 그 작품을 끊임없이 닫으려고 한다. 그렇게 작품은 그 대화, 우리가 비평 혹은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더 위대해진다(토도로프, ‘구조시학’).

그런데 타락한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부모의 타락을 응징하는 것이 당연하듯, 그 자식인 작품도 응징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그때 자식은 더 혹독한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고, 하지만 그 도전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때 작품은 오히려 더 위대해질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정답은 모른다. 이것은 해답이 아니라, 그저 함께 고민하자는 권유이며, 질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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