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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독립'을 꿈꾸는 당신에게

조회수 2017. 11. 1. 17: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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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하여

지난주에 그동안 함께 했던 ‘Gold Star’ 냉장고와 이별하고 메탈 외관의 LG 냉장고를 들여왔다. 망가져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실려 나간, 언제 출고됐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된 금성 냉장고… 냉장고가 바뀌니 생활가전의 혁명이 피부로 느껴진다. 문을 오래 열고 있으면 삐~삐~ 알람을 들려주고, 선반도 많다. 몸체도 크고 아름다우며, 상냉장·하냉동이라 허리도 편하다.

2006년 7월 17일에 독립해서 이제 독립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살림살이들이 아무리 문제를 일으켜도 꾸역꾸역 써왔는데 너무 힘들었던 작년—나는 지난 1년간 많이 아팠고 동굴 시절의 웅녀처럼 웅크린 삶을 살고 있었다—내 건강과 함께 냉장고가 망가지면서, 다 바꿔버리자는 생각을 했었다.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소도 정리도 다 내 몫이니까 치밀한 계획과 탄탄한 체력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독립하던 해, 학원에서 컴퓨터 바꿀 때 넘겨받은 A 드라이브가 있는, 2000년산 컴퓨터, 역시 학원에서 넘겨받은 25인치짜리 뚱뚱이 브라운관 TV, 아는 후배 어머니께서 넘겨주신 금성 냉장고(그때도 이미 고물이었지만, 나에겐 유용했다) 모두 지난주에 내 집에서 내보냈다. 5.5kg짜리, 이불도 못 빠는 중고 세탁기는 19kg짜리 똑똑이 세탁기로 작년에 바꿨다(유일하게 배송과 동시에 사용이 가능한 가전이었다.).

처음에야 돈이 없어 그랬지만, 충분히 안정된 후에도, 난 왜 그렇게 불편한 물건들을 끌어안고 오랜 시간을 버텼을까… 혼자 사는 기간은 잠깐이라는 막연한 믿음,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해 ‘4인 가정’에서나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갖추는 것에 대한 죄책감, 정말 확실한 정착지를 정한 그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굳건한 믿음 때문에 난 많은 욕구를 성공적으로 억압했다.

그런 굳건한 삶의 이상향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난 계획 없이 독립했고, 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내 가족도 내 친구도 내 선배도 후배도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며 혼자 살아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도 이 삶이 10년 넘게 지속될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 노명우 교수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하여]에서 말한 ‘1인용 테이블’을 선택인지 모르고 선택했다. 그런데 나는 왜 굳이 태어나면서부터 무료로 제공받은 ‘4인용 테이블’의 편안함을 떠나 여기 와 있는 것일까?

혼자 사는 시간이 10년 넘게 지속될 줄 알았다면 난 독립할 생각을 했을까?

방 안에서 벌레가 나와도 같이 끔찍해 할 사람이 없고, 아무리 천장이 높아도 테이블 위에 의자를 놓는 위험한 곡예를 하며 어떻게든 전구를 갈아야 하며, 물이 고인 천장에서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을 때 불러댈 사람이 없는, 눈 뜬 모든 순간이 혼자만의 선택의 시간으로 가득 찬다는 의미인 줄을, 더는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동으로 무서움을 안 타는 성격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뜻인 줄을 알았다면, 난 독립을 했을까? 

나는 왜 여기 와 있는 것일까?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서울에 와서 토르소(torso; 머리와 팔다리 등이 없는 몸통 조각)가 된 느낌으로 사는 몇 년 동안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 것일까…

내가 한창 데이트하고, 돈 쓰고 다닐 만한 나이였을 때 내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결혼한, 또는 결혼 후 갓 출산을 겪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했던 조언이 있다.

“능력 있으면 결혼하지 마!”

그리고 그녀들이 말하는 ‘능력’의 의미는 ‘경제력’이었다. 경제력이 있으면 혼자 살 수 있다는 명제가 그녀들의 전제였다.

정말 돈만 있으면 혼자 사는 것이 당연할까? 그때 그녀들은 결혼생활이라는 것에 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독립 직전에 언니네 가정에서 살면서 연년생 남매인 조카를 같이 키웠었다. 100일도 안 된 아기와 내가 같은 방에서 자고(이건 정말 심했다), 언니 내외는 거실에서 첫 조카와 같이 잤다. 수면은 늘 30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만큼 힘들었다. 부평과 잠실을 오가면서 출퇴근했고, 밤에는 번갈아 가면서 깨는 조카들의 잠 투정에 밤새도록 잠을 설쳤고(한 번 깨면 반드시 울었고, 울기 시작하면 원하는 만큼 울어야 다시 잠이 들었다. 하아….)

주 5일 정도의 쉬는 날엔 하루 종일 정말 헌신적으로 육아에 힘썼다. 그때 나의 자기 밀도는 0%였다. 언니와 똑같이 화장 하나도 못하고, 아기들을 업고 들고 병원과 마트를 오갔으며, 하루 종일 뭐든지 아기들에게만 맞춰서 움직였다. 그리고 일하는 날은 일을 마치고 새벽 1시에 도착해서 다시 조카들의 잠투정을 받아줬다. 우리 둘 다 아기들에게 완전히 속해 있었다.

난 육아가 뭔지 안다. 그것은 정말 현실적인 고통이 있는 생존의 문제이며 종교만큼이나 강렬한 자기 포기, 어쩌면 자기 망각의 과정이다. 동시에 형언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다. 난 그 시간에 그러니까 아기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시기인 그 시기에 조카들과 끈끈한 친밀감을 맺기 위해 포기한 다른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 조카들의 탄생과 양육의 경험은 세상을 보는 내 눈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가치가 있었고, 내 삶의 많은 것을 내던졌다 해도 아깝지 않다.

언니와 나 모두에게 육아가 현재였던 그 시점에 난 내가 언니에게 많은 것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니도 역시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의 ‘당연함’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언니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때는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냥 살아내기 바빴다. 나도 나를 당연하게 여겼다.

9명에서 10명이 왔다 갔다 하는 가족 안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밑으로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은 아예 스스로 묵살하곤 했었다. 그런 나에게, 생애 첫 육아의 경험은 선택이 아닌 ‘반응’이었다. ‘지금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가 아닌가’가 유일한 행동의 기준이었다. 그것이 ‘역할 자아’에 충실한 나였다. 이건 언니 일이라며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나였지만, 역할 밀도로만 나를 채운, 나답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원래 임용고시 준비를 하려고 시작했던, 서울에 있는 학원의 파트타임 강사일을 전임으로 전환하는 데는 이런 환경의 답답함이 한몫했다. 난 그 환경이 버거웠다. 그래서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차피 그 핑계로 독립하지 않았어도 내 성격에 두 조카와 언니를 집에 두고 가방 들고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가는 선택은 절대 못 했을 것이다. 계획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의 의미를 진심으로 깨닫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어떤 삶을 벗어나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때때로 어떤 선택의 ‘발생’은 그 선택의 정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랑이 뭔지 몰라서 사랑을 시작하고, 이별이 뭔지 몰라서 이별을 결정하듯, 난 독신의 삶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못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독신의 삶이 ‘발생’됐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오며 내가 나와 삶과 가족과 ‘역할 자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혼에 관해선,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 망설이거나 미룰 수 있었지만, 독립된 삶에 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에 ‘상황 전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독립하기 전의 삶에서 나를 지탱하던 의식주는 ‘정체불명의 당연함’이었다. 잠자리와 의식주, 따뜻한 밥상, 깨끗한 세탁물 모든 것이 고맙지만, 모호한 고마움이었다. 모호한 모든 것은 인식되지 못한 상태고, 그것은 그냥 익숙한 당연함일 뿐, 나에게 닥칠 현실로서 실감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돈을 벌어오시는지, 어머니가 어떤 귀찮음을 거쳐 그 모든 생활이 유지되는지에 대한 명확함이 없었다. 그 시간을 벗어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주 최근에야 진심으로 이해했다.

아마 나에게 ‘능력 있으면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라고 말한 여인들도 그 시점에서만 발화했을 뿐, 돌이켜 볼 수 있는 시점인 지금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힘들었지만, 가치 있는 시간으로 재해석될 테니까… 그렇지 않다 해도 내가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들에게도 역시 ‘정체불명의 당연함’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나에게 설명할 재간이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인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그 특정인 당사자에게만 유효한 경우가 많다.

결혼하여 현실로서 살아내며 힘든 그들이 나에게 독신을 적극 권했던 것과 상관없이 난 한 번도 독신을 꿈꾼 적이 없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이상이 너무나 높아 신중했을 뿐, 난 현재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나에게 현재는 늘 과도기로만 인식됐다. 독립하여 혼자 사는 것은 안정되지 않은 삶의 방식이며 과도기일 뿐이라는 막연한 편견 때문에 나는 10년을 어중간한 상태로 살았다.

에어컨 없이 여름을 버티고, 이불도 못 빠는 세탁기를 끝까지 끌어안고, 부팅하는데 온갖 소음을 내는 고철에 가까운 컴퓨터를 바꾸지 않고, 남이 쓰다 버린 금성 냉장고를 감사히 쓴 이유는 약간의 절약정신과 상당한 자기부정—독립되고 온전한 가구의 일원으로서의 삶의 형태에 대한 부정—이 작용했다.

지금 나는 새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 언젠가는 새로 시작할 날이 온다. 이 모든 억압은 가치가 있다. 난 나의 상태를 읽을 생각도 안 하고 막연한 불안을 안고, 세월을 허비했다. 부모님의 4인용에서 나의 4인용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새로운 4인용 테이블을 세팅하고, 자녀를 낳아 내 생물학적 DNA를 남기는 것만이 정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성찰도 없이 맹신하며.

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지금 내 삶의 형태를 선택하고 인정한다. 나의 식탁은 1인용이다.

외로움과 우울감에 대한 대책,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능력, 역할 자아와 단독 자아 사이에서의 균형감각, 친구를 만들고 관계를 지속하는데 필요한 정서적 안정과 인내심, 실수투성이인 자신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 사실 결혼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에게도 필요하다. ‘경제력’은 삶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누군가가 없어서 홀가분한 기분이라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난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나 대신 돈을 벌거나 살림을 해주거나 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삶에 적응해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능력이 있으면 혼자 살면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상상을 현실로서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아무 혜택 없이 100 % 책임만 지다가 가정을 떠나 독립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가 만나 함께 하는 삶에서 필요한 모든 능력이 1인 가구의 구성원 1인에게 요구된다. 그렇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나에게 ‘능력만 있으면 독신의 삶이 더 낫다’라고 말했던 여인들도 나중엔 인정했다. 나를 통해 1인 가구의 처.절.한. 구.체.성을 공유한 그녀들은 이제 그 말을 철회했고, 우리 모두 젊음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혼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나도 당연히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없다. 애초에 환상이 없으니까 섣부른 시작을 안 한 것이기도 하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역할 밀도’, ‘자기 밀도’와 같은 용어들, 테이블 비유 그리고 객관적 통계 자료와 수치들을 통해 나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 철학적 사회과학적 이해는 나를 많이 안심시켰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생각이 있었다.

역할 밀도와 자기 밀도는 반드시 반비례관계일까.

자기 역할에 대해 밀도가 높은 사람은 정말로 자기 밀도가 낮을까? 혼자 산지 10년 그리고 일반 직장과 다른 환경 속에서 완전히 혼자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은 나는 직업과 자아에 대한 분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역할 밀도가 높다. 그렇다고 자기 밀도가 낮은 것도 아니다. 나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루신 4인용 테이블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어떻게 당신 아버지의 테이블을 이어받는지를 보고 자랐다. 종가의 맏이로서 아버지의 역할 밀도는 매우 높았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고, 새롭게 만든 4인용 테이블의 가장으로서의 역할 밀도는? 애초에 그 과정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아버지가 벌어들인 물질 대부분은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구신 테이블의 유지와 보수에 소용됐고, 내 아버지의 테이블은 새로 세팅되지 않았다. 돈이 있으면 아버지의 형제와 그 형제의 자녀들에게 흘러갔다. 내 눈에는 아버지와 나의 역할 자아가 불균형했고, 그것은 부당했다. 그곳에서의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따라서 난 그 테이블에서 매우 깔끔하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인식은 ‘명확하지 않은 당연함’이었기에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벌어 모았던 단돈 700만 원이 내 독립자금이었고, 이사도 친구와 둘이 했다. 부모님의 방문은 딱 두 번이었다. 그 테이블을 벗어나 온전히 나만의 테이블을 구축하면서, 난 100% 새로운 역할 자아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역할들은 강요되거나 구축당하거나 이어받은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고안하고, 고르고, 고민했다. 아마도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포기한 것들의 가치는 매우 높았다. 삶에서 타인의 역할을 통해 누렸던 혜택들을 모호한 당연함에서 명확한 감사함으로 바꿔 적어야만 독립과 공존이 가능하다. 이제 난 가족 안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고 늘 함께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내가 돌아올 곳은 이제 그곳이 아니다.

독립의 의미가 단순한 ‘자취’에서 ‘1인 가구’로 변하는 세월 동안에 겪는 심리적 복잡함은 아이가 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고, 배우자가 되며, 부모가 되고, 학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복잡함과 다르지 않다.

결혼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을 겪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독신자의 삶이 낭만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찬란하거나 단순하지는 않다. 핑크빛 자유로운 로맨스로 가득 찬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똑같이 당황스럽고, 힘들며, 불안한 10년을 겪었다. 그렇다고 딱히 무섭고 두렵고 힘들고 비참하지만도 않다.

서로의 삶에 대한 섣부른 상상과 부러움은 자칫 서로의 노고와 무게를 격하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어떤 삶이 더 힘든지 그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를 넘어서 위험하다. 우리는 삶은 이제 수시로 1인용과 4인용 테이블을 넘나들고 있다. 양쪽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나 자신을 위해 중요하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하여]는 독립된 삶의 연대를 역설하며 책을 맺는다. 내가 10년 넘는 독거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족이 상징적 의미로서의 역할을 해 줬다면, 실질적 버팀목이 된 것은 다양한 ‘친구’였다. 그들 중에 나와 완벽하게 같은 처지, 그러니까 애인 없이 가족과 떨어져 100% 경제적 독립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적당히 부러워하며 서로의 삶을 통해 자기 삶에 감사함을 채워나간다. 반찬을 해 주거나 선물을 보내거나 같이 울어주거나 아플 때 전화해 주는 진짜 친구들이 이제 서울에도 많다. 난 이제 토르소가 아니다. 그런 연대가 있었기에 독립도 가능했을 것이다.

얼마 전, 자주 통화하는 친구에게 나는 이제 외롭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 친구도 혼자 산다. 그 친구가 나에게 말하길 어떻게 그렇게 진심으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느냐며 복잡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얼마나 정확한 반응인가. 그도 혼자 살기에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부당하고 만족스럽지 않으며 지루한 이 삶에서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상상’으로부터 나는 나를 구출했다. 그리고 비로소 충만함을 느꼈다.

온 세상이 독립적인 자아들이 만나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미 새로운 형태의 삶을 (나도 모르게) 선택한 지 10년이 되는 마당에 이전에 학습한 ‘이상적 삶의 교리’를 붙들고 불안해해 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혼자다. 현재로선 나의 정서적, 물리적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은 있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내가 모르고 있던 나를 만나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했다. 자기 밀도를 높일수록 내 옆 사람의 역할 밀도는 낮아지고, 그의 자기 밀도도 높아진다.

“자기 밀도가 높다는 뜻은 단독자로서 성숙해진다는 뜻이지 독단자로서 혼자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석촌호수 바로 앞에서 불안하게 첫잠을 잤던 2006년 7월 17일. TV를 집에까지 날라주며 힘들어 죽을 뻔했던 배명고 제자들과 아파서 결근한 날에 먹을 것과 약을 사들고 왔던 제자들, 택배 때문에 내 방을 열어야 했을 때 편지를 남기셨던, 깐깐해서 나와 죽이 잘 맞았던, 날 며느리 삼고 싶어 하셨던 주인집 엄 할아버지, 공부하느라 돈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트에서 본 장바구니 두 개를 안기고 갔던 친구 J, 온갖 힘들고 기쁜 날을 함께 해줬던 돌 군…

온오프에서 친구가 된 소셜미디어 친구들… 친구 같은 애물단지 제자들…

나의 독립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개입됐다. 사실 정말 혼자인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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