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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여전히 '김복남이 태양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조회수 2017. 3. 3. 17: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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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떠오른 어느 날, 김복남은 마을 사람 모두를 죽였다.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죽였다. 아니 어쩌면 김복남을 둘러싼 모든 게 이 살육의 방아쇠였달까? 김복남은 카뮈의 소설처럼, 이 끔찍한 살인의 복잡한 이유를 그저 태양 때문이라고 대충 설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김복남을 향한 학대는 길고 익숙했기에, 어느 하날 끄집어내서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이유가 붙여지지 않은 남은 삶들이 억울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어떤 외부세계와의 충돌로 깨달음을 얻는다. 삶은 그렇게 깊어진다. 누군가는 그걸 철이 든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성숙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외부세계의 경험이 없는 한, 우리는 스스로 자라기 힘들다. 김복남에게 외부 세계는 없었다. 뭍으로 나가는 배는 오로지 남성들에게만 허락되었고, 그 배에 탑승할 자격은 남성 혹은 남성에게 자격을 부여받은 자들이다. 김복남은 그 좁고 잔인한 섬에서 한 치도 자랄 수 없었다. 자라지 못한 건 김복남의 탓이 아니지만, 김복남이 져야 할 책임이었다. 그것이 섬의 규칙이다.

섬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은 끔찍하지만 일상적이다. 누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하게 잔인하다. 온몸이 녹초가 되도록 일을 하는 김복남은, 지붕에 올라 집을 수리할 수 없단 이유로 욕지거리와 함께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다. 지붕을 수리하고 배를 모는 것은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일이고, 섬 안에 있는 어떤 여성도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 한다. 그것은 ‘남자들의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김복남의 시어머니는 ‘여자는 남자의 X을 잘 물고 살아야 한다’고 김복남에게 호통친다. 그것이 섬을 지탱하는 규칙이다.

김복남의 딸 연희는 김복남과 경쟁한다. 짙은 화장을 하며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낸다. 연희는 그것을 ‘사랑받기 위해’하는 노력이라 말한다. ‘어떻게 사랑해 주는데?’라는 해원의 물음에 연희는 제 성기를 가리킨다. 연희는 어린 나이임에도 알고 있었다. 이 섬에서 자기의 생존은 자기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연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남자들의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이지만 어른이었던 연희는 어른이지만 아이인 제 미래의 모습, 김복남을 미워하며 또 동정한다. 어차피 그 둘은 자기들이 섬의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김복남에게 어느 날 우연히 다른 세상이 찾아온다. 구원이었다. 어려서 섬을 떠난 해원은 고된 도시살이를 잠시 피하고자 고향이었던 섬을 찾는다. 하지만 해원이 찾은 섬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해원이 목격한 제 친구의 지옥은, 해원에게는 또 다른 버거운 짐이자 스트레스일 뿐이다. 김복남은 해원을 구원으로 여긴다. 해원은 여성이지만, ‘남자들의 비즈니스’를 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복남은 해원에게 구원을 구걸하지만, 해원은 외면한다. 섬의 규칙을 깨고 복남의 구원자가 되기에 해원은 자신의 삶도 충분히 고달프다.

해원을 동경하는 것으로 용기를 얻은 복남은 섬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배를 몰아 복남을 탈출시켜주기로 약속했던 득수는 ‘남성들의 연대’를 선택한다. 붙잡힌 복남은 두들겨 맞기 시작한다. 이를 보다 못한 연희는 제 아비의 폭력을 막아섰고, 그 과정에서 넘어져 돌부리에 부딪히는 불행한 죽음을 맞는다. 딸의 죽음으로 구타는 끝났다.

섬의 세계에서 탈출에 실패하고 딸까지 잃은 김복남에게 남은 희망은 없다. 태양을 이유 삼아 섬을 도륙 낸다. 복남의 살육에는 급박함이 없다. 어차피 도망갈 데도 없다. 섬은 복남을 가두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퇴로를 만들어주진 않았다. 섬은 딱 그만큼만 공평했다. 복남의 낫으로부터 도망치던 복남의 시어머니는, ‘저기 남자들이 온다. 넌 뒈졌다’며 안도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시어머니를 구원하지 않았고, 복남은 자기 자신을 구원했다. 모두가 죽었고, 섬의 규칙은 드디어 끝났다.

이것은 화끈한 복수극이 아니다. 김복남의 세상은 사실 처음부터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모두가 사라져야 비로소 전복되는 세상은, 사실 김복남의 세상이 절대 전복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김복남을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전복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다. 수많은 김복남들의, 파멸을 동반한 전복 시도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김복남의 파멸은 해원의 세상을 바꾸었다. 지금껏 쭉 학대의 방관자로 살았던 해원은, 섬에서의 사건 이후 고발자가 되었다. 섬에 들어가기 전에 해원은 남성이 여성을 폭행했던 사건의 목격자로 경찰에 몇 번 불려 나갔지만 ‘나는 모른다’고 발뺌했다. 섬에서의 사건 이후 해원은 경찰서에 방문하자마자 가해자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저 새끼예요’라고 말한다. 해원은 김복남의 구원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자기의 세상의 구원을 시작하고 있다. 김복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제 이 영화를 본 모두가 이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김복남이 태양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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