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서? 이제 고용문제의 진짜 해법을 고민할 때

조회수 2017. 2. 10. 19: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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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문제는 단순하게 '착한 기업'과 '나쁜 기업'의 이분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한국 진보 진영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고, 그래서 정규직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은 다수를 넘어 지배적인 인식에 가깝다. 집회나 농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구호가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
출처: 제공: 민중의소리
“해고는 살인이다”

이 구호를 현실에 온전히 적용할 수 있을까? 실은 따져볼 게 너무 많다. 이 구호는 산업에 따라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거나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를 지적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수요처로부터 미리 주문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 기계, 조선업, 건설업 등 수주산업(受注産業) 입장에서 보면 정규직 생산직 숫자는 회사 경영이 막장까지 갔을 때도 사수해야 할 베이스라인에 가깝다. 계속 호황임을 전제하지 않는 이상 일정 숫자를 넘기긴 어렵고 나머지는 하도급과 사내 하청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베이스라인 수준의 인력은 논에 댄 물과 같은 것이다. 농사 지을 때 적정량의 물을 논에 대는 것은 필수지만, 벼가 성장하는 수준에 맞춰야만 한다. 그 이상 물을 대면 벼는 썩고 만다. 물론 물이 없다는 것은 농사를 안 짓는다는 이야기고, 최소 인력도 없다면 회사가 망했다는 이야기다.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서? 

일정 수준의 유연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경영계획을 수립할 수조차 없다. 조선소로 보면 수주량에 따른 스트레스 테스트 시나리오에 따라 고용도 결정된다. 오뚜기가 시식 사원 1,800여 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해 ‘착한 기업’으로 화제를 모은 적 있는데, 실은 농심(99%)도 삼양식품(100%)도 시식 사원을 (거의) 모두 정직원으로 채용한다. 이런 고용 형태는 농심, 삼양, 오뚜기, 롯데제과 등 수요가 일정한 산업군에서만 가능하다.

오뚜기가 특별히 ‘착한 기업’이라서가 아니라 식품 산업의 조건이 시식 사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도록 하는 거다. 농심(99%)과 삼양식품(100%)도 오뚜기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시식 사원이 정규직이다.

물량이 80~120일 때 100명을 유지하면서 물량이 적으면 작업 속도를 늦추거나 잔업을 제한하고, 물량이 많으면 잔업을 늘리거나 작업 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완전 자동화 산업이거나 수요예측이 가능한 내수산업은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경쟁 시장에서 세일즈를 통해 따오는 일감이 유동적인, 가령 물량이 30~170일 수 있는 수주산업에서는 그런 방식의 작업 속도나 잔업 통제를 통해서 인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스라인 이상의 인력은 비정규직을 고용하거나 아웃소싱할 수밖에 없다.

잡셰어링과 노동시간 단축 

이럴 때 유연성을 강조한다고 산업군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단, 최대치의 고용을 만들려면 잡셰어링(Job Sharing; 일자리 나누기, 본래 의미는 ‘한 직무를 두 개 이상으로 분할’하는 것)과 노동시간 단축이 동반돼야 한다. 근데 이 역시 부부 맞벌이가 온전히 가능한 산업도시 여건과 동반되어야만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잡셰어링과 노동시간 단축을 동반한다는 것은 인력을 많이 뽑되 잔업을 최소화하고, 현재 임금도 일정 부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경영 계획을 하는 관점에서 현재의 임금은 원가에 반영된 ‘시장가’가 된다. 가격경쟁력을 가지려면 가치를 올리거나 원가를 줄여야 한다. 산업하강기에는 시장이 죽으니 원가경쟁력만 남는다.

하지만 외벌이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만 가능하게 형성되어온 산업도시에서 잡셰어링과 노동시간 단축은 쉽지 않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난리를 치면서 정규직 기득권(?)을 사수하려고 애쓴다. 게다가 거기에 숙련성이라는 이슈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욱 간단치 않다.

조선업과 중후장대산업의 위기

생산직에 종사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기준 연봉 7천만 원 이상을 번다고 했을 때 굉장한 ‘귀족’인 것 같아 보여도 그 전제는 그 아내가 ‘정규직 일자리’와 아무 상관 없다는 조건과 엮여 있다. 교사, 간호사, 약사, 의사 등이 아닌 한 안정적 직장은 산업도시에서 여성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규직 남성은 고임금을 포기할 수 없다.

물론 부동산 수입과 가외 수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생산직 정규직의 자녀 상당수가 캥거루처럼 부모의 임금과 부동산 소득에 기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이 쉽사리 임금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4인 가족에 근거한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은 수도권에서는 무너졌지만, 수주산업을 수행하는 산업도시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모델이다. 그래서 조선업과 중후장대산업(重厚長大産業)의 위기가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동일한 고용을 마냥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유연성은 우파? 고용안정은 좌파? 

그렇기에 나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가 우파고, 고용안정 강화가 좌파라는 단순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글로벌 경쟁이 없고, 분업체제가 지금 이대로 유지된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오히려 기본소득을 주는 방향에 찬성하는 게 맞다고 본다.

안희정 지사는 대연정 발언과 더불어 노동 유연성 이야기로 비판받고 있는데, 신자유주의를 싫어하는 감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산업이 움직이고 글로벌 분업체계가 쉼 없이 움직이는 걸 감안하자면, 노동 유연성 이야기를 한다고 무조건 비판만 하는 건 부당하다. 외려 어떤 산업군을 지원하고 교육과 노동을 엮을지에 관한 대안을 따져봐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그러니 박정희의 유산이었던 산업 노동자에 대한 노스텔지어만 갖고는 경제, 산업, 노동, 교육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다. 좌파의 경제, 산업, 노동, 교육 정책은 어때야 하나.

한편 남경필 지사는 공장 2개 규모의 판교 밸리가 7만 명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했다며 스타트업 벤처의 고용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첨단 산업과 더불어 전통적인 제조업을 어떻게 진화시키고 엔지니어와 숙련공을 어떻게 재교육해 일자리를 만들지에 대한 큰 그림을 차기 대통령은 제시해야 한다.

오뚜기는 대우조선이 아니다 

오뚜기, 제일제당, 롯데제과와 중공업, 수주산업을 동일선에 놓고 정규직 비정규직, 원청 하청 비율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이다. 동일 산업이 전 지구적으로 어떻게 조직을 구성하고, 노동력을 고용하며 비즈니스를 영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최우선이다.

정리하자면, 민주노총의 대표적 구호 중 하나인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이야기하려면 외벌이와 맞벌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남자 혼자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4인 가구라는 역사적 모델을 계속 강조해선 문제를 풀지 못한다. 노동은 젠더와 가족 문제에 맞닿아 있다. 

최근 유승민 의원은 비정규직 고용 총량을 제한해 정규직 고용을 산업별로, 규모별로 달리 강제할 수 있다고 했는데 노동정책의 관점에서는 동의한다. 물론 노동자는 잘못이 없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용 상태와 상관없이 안정적일 수 있는 복지체계와 재고용과 재교육을 국가가 신경 쓰는 게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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